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스스로를 '촌놈'이라고 불렀다. 수차례 그렇게 표현했다. "촌놈이 세상에 눈을 떴다"거나 "촌놈이 여기까지 왔다"는 식이다. 과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어법을 쓰고 상대가 누구든 허리를 굽히는 인사를 스스럼 없이 한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최수현 금융감독원장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이런 처신은 금융계에는 꽤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은 놀랄 수밖에 없다.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고위 관료의 전형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금융 검찰’로 불리는 금감원의 수장에 오른 뒤에도 그의 스타일은 그대로다. 권위의식을 던져 버렸지만 시장에서 느끼는 금감원장의 권위는 예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가볍지 않다.

최 원장이 단골집으로 소개한 곳은 남도복집. 서울 여의도의 한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이다. 폼도 별로 안 나고 따로 칸막이도 없는 곳이다.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격을 따지기 싫어하는 최 원장과 어딘지 닮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삼합 낙지숙회 해삼 멍게 등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낙지숙회가 특히 쫄깃했다. 역시 음식 맛은 식당 분위기로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뒤에 나온 복 맛도 일품이었다.

○비주류 경험 덕분에 금융에 대한 다양한 시각 갖춰

[한경과 맛있는 만남] 최수현 금융감독원장 "비주류 벽 넘다 보니 고개 숙이는 법 배웠죠"
그가 지난 3월 수석부원장에서 바로 금감원장에 임명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금융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른 그지만, 몇 번이나 “아직도 멀었다”고 몸을 낮췄다. 오랜 ‘비주류’ 경험 때문인 듯 싶었다.

고시 합격부터 드라마 같았다. 최 원장은 행정고시 24회 때 1, 2차 시험을 통과했다. 하지만 학생운동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3차 최종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을 딛고 대학 졸업 전에 이뤄낸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아들의 합격 소식을 온 동네에 자랑하며 잔치를 벌였던 어머니는 몸져 누웠다. 이듬해 25회 시험을 다시 봐 최종 합격했다. 최 원장은 “결국 통과했는데, 나처럼 3차에서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탈락한 사람이 몇 년 전 연락해 왔다. 20여년 만에 부당하게 탈락한 것을 구제받았다고 했다. 같이 소주 한잔 하며 축하했다”고 말했다. 그 장소가 바로 남도복집이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 서울대 생물교육과를 졸업한 그에겐 학연이나 지연도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서울대 출신이 웬 엄살이냐’며 갸우뚱할 만한 얘기를 하면서도 그는 진지했다. 최 원장은 “서울대 상대와 법대 출신이 주류인 재무부에서 자리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인사에서도 여러 번 이른바 ‘물’을 먹었다. 청와대 등에 파견나가 있다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금융위원회로 돌아왔지만 6명의 국장 후보 중 유일하게 보직을 받지 못했다. 그는 그때 받은, 보직이 빠져 있는 ‘금융위원회 국장 최수현’이라는 명패를 늘 곁에 두고 있다. 그 명패를 보면 번쩍 정신이 난다고 했다. “열심히 해야지, 정신 차려야지, 나태해지면 안 되지 하는 거죠.”

소주잔이 한 바퀴 돌았다. 최 원장이 문득 담배 한 대를 달라더니 입에 물었다. 동석자들이 라이터를 찾느라 부산을 떨자 “됐다”고 했다. “그냥 물고만 있으려는 거예요.” 수년 전 담배를 끊은 뒤 미련이 남으면 이렇게 달랜다는 설명이었다. “지난 5년간 집에서 저녁밥을 먹은 게 열 번도 되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2008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전문위원으로 파견나갔을 때 그는 국회 수위들에게도 늘 밝게 인사했다. 뉴스를 찾아 헤매는 기자들처럼 아침마다 모든 정무위 국회의원 방을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악바리’가 되자 그를 인정하는 이들이 늘었다.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으로, 금감원 수석부원장으로 승승장구한 배경이다. “한때 비주류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나만큼 금융을 모든 시각에서 다 다뤄본 사람도 없더군요. 청와대에서도 봤고, 글로벌 금융시장 관점에서도 봤고, 국회 관점에서도 봤습니다.”

○“금감원은 직무 윤리와 기강 갖춰야”

최 원장이 종업원을 부르더니 매운 청양고추를 따로 달라고 부탁했다. 매운 맛을 즐기는지 그는 이후에도 ‘청양고추 리필’을 요청했다. 말이 빠른 그의 스타일과 어울렸다. 복어살에 계란물을 입혀 노릇하게 지져낸 전이 상에 올랐다. 젓가락을 바쁘게 놀리며 최 원장은 지난 2년간 금감원이 겪은 큰 변화를 얘기했다. 저축은행 연쇄 영업정지 사태부터 꺼냈다. 2011년 1월 삼화저축은행을 시작으로 2월 부산저축은행을 거쳐 총 27곳이 문을 닫았다. 이 과정에서 금융회사를 감독해야 할 금감원 직원의 비리가 드러나기도 했고, 몇 명이 목숨을 끊기도 했다.

2011년 3월 취임한 권혁세 전 금감원장은 대대적인 쇄신책을 들고 나왔다. 4급 이상 모든 직원은 부모를 포함해 재산공개를 하도록 했다. 금융회사 감사로 내려가는 관행도 없앴다. 은행·증권·보험·저축은행 등 권역 간 교차 인사도 실시했다. 이 일을 실제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당시 수석부원장이던 최 원장이다. 금감원 내부에서는 ‘개혁의 기수’였던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최 원장은 “저축은행 사태에 대한 대처는 잘한 거라고 생각한다”고 일축했다. “업무의 가장 기본인 직무 윤리와 기강을 세웠기 때문”이란다.

그는 젓가락을 멈추고 정색했다. “잊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저축은행 문제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금감원이 그걸 잊는 순간 자만에 빠지고 맙니다.” 실제 저축은행 사태는 금융소비자 보호를 금융감독의 화두로 떠오르게 했고, 금융소비자보호원(금소원) 설립 문제로 이어졌다. 앞으로 금감원을 쪼개 기능과 조직을 일부 금소원으로 이전해야 한다. 금감원장으로서의 견해를 물었지만 민감한 문제인지 답이 짧았다. “그 문제에 관계없이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금융회사들은 요즘 죽을 맛이다. 저금리와 불황 등이 겹쳐 은행, 증권, 보험, 저축은행 등 모든 업권의 수익성이 크게 나빠졌다. 최 원장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그는 최근 금융지주회사 회장단과 간담회를 했다. “은행권 순이익이 작년 2분기엔 2조4000억원이었는데 올 2분기엔 1조1000억원으로 줄었습니다. 앞으로 더 나빠질 수 있어요. 지난 10년간 분기당 순이익이 1조원에 못 미친 적이 일곱 번 있었는데, 2003년 카드 사태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입니다. 지금 금융회사들이 그때만큼 어려움을 겪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작년 봄부터 금융회사에 해외 진출을 독려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라고 했다.

○자다 일어나 금융 관련 자료 보기도

살이 도톰하게 오른 병어찜과 오징어 초무침이 추가로 나왔다. 매콤한 양념이 입에 착 붙는 병어찜이 젓가락을 자꾸 불러서 금세 뼈만 남았다. 최 원장이 문득 옆자리에 밀어 둔 묵직한 가방을 끌어당기더니 서류철을 하나 꺼냈다. 삼성증권이 홍콩에서 손실을 본 것과 국민은행이 카자흐스탄에서 1조원 가까운 손해를 본 이유를 정리한 50여페이지짜리 문서였다.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국내 금융회사)는 해외에 나가지 않을 수 없어요. 국내 금융회사 해외 점포가 363개인데 중국에 69개, 미국에 54개, 베트남에 40개가 있습니다. 이 나라들 외에는 거의 없다는 얘기예요. 아시아권만 해도 공략할 시장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친 김에 그의 가방을 슬쩍 들여다봤다. 그런 서류철이 13개나 됐다. 내용을 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제목만 한 번 훑어봤다. 가계부채 청문회 후속 조치, 자산운용산업 부실화 현황 및 대응 방안, 금융회사 해외 진출, 금융지주회사의 수익 문제, 저축은행 문제, 경기 부진 등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가방 무게가 얼추 10㎏은 돼 보였다. 헌법 전문을 담은 빨간 소책자는 자주 들여다봐서 손때가 묻었고, 아이패드에도 온갖 보고서가 잔뜩 담겨 있었다. 금융에 대한 애정과 의욕이 넘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밤중에도 일어나 자료를 봅니다. 이런저런 현안에 마음이 쓰여 자다가도 생각이 나요.”

○“국민이 정말 필요로 하는 상품 개발 독려할 것”

마지막은 얼큰한 복매운탕. 신선한 복어살이 듬뿍 담겨 있었다. 배가 부른데도 시원한 국물에 자연히 밥을 한술 말았다. 최 원장은 금감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금감원에 모이는 금융정보 상당수를 틀어쥐고 있었어요. 앞으로 웬만한 정보는 외부에 공개할 계획입니다.” 금융회사들에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도록 독려하겠다고도 했다. “고령자 대상 질병보험, 여행자 보험, 대학생 학자금 대출처럼 국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금융회사가 수익이 안 난다며 개발을 하지 않은 상품이 많습니다. 이런 상품을 잇따라 개발하면 국민이 금감원을 좀 더 친근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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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유진빌딩 지하에 있는 남도복집은 전라도식 향토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복집인 만큼 복국 복매운탕 복찜 복튀김 복전 등 복 메뉴가 다양하다. 홍어요리(홍어삼합 홍어찜 홍어전 홍어애탕), 낙지요리(연포탕 산낙지 낙지초무침 낙지찜) 등도 별미를 자랑한다. 계절에 따라 굴·참꼬막·매생이 등도 주문할 수 있다. 홍어삼합에 들어가는 묵은지는 전남 해남에서 수확한 배추로 담가 2년 동안 숙성했다. 짭짤한 감칠맛이 좋다.

복국이나 탕, 죽 등의 가격이 1만원 미만으로 비교적 저렴해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

참복지리와 탕은 2만5000원, 그냥 복지리와 탕은 1만9000원이다. 이 밖에 낙지비빔밥, 매생이굴국, 매생이복국, 홍어애탕 등 해남 특유의 요리를 적당한 값에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이상은/류시훈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