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 이상 노인의 인구비율이 늘고 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지하철이다. 지하철의 노약자석은 물론 그렇지 않은 좌석도 노인분들이 태반인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는 65세만 되면 경로우대증이 나오는 동방예의지국이다. 이제 그 노인의 비율이 점점 늘고 있으니 지하철 재원 확보에 문제가 없을까? 걱정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를 먹었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혜택을 받고 있는데, 65세 이상 노인층에게 경로우대증을 지급하는 제도가 과연 바람직한 제도인지 이제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내가 그것을 받을 나이가 되면 반대론자의 의견에 펄쩍 뛰겠지만.

최근에 겪은 일이다. 노약자석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가는데 노인 한 분이 언성을 높였다.

“요즘 젊은 것들이 싸가지가 없어. 노약자석이 아니더라도 노인이 앞에 서 있으면 발딱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데 버티는 것들이 있단 말이야.”

‘싸가지’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귀에 거슬렸다. 가면서 생각해보니 ‘젊은 것들’도 피곤할 때가 있고, 앞에 노인이 서 계신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리고 요새는 60대, 70대 노인분들도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정정하게 보여 과연 이분께 자리를 양보해야 하나, 망설여질 때가 있다.

옷차림이나 액세서리를 화려하게 한 초로의 할머니나 짙게 화장을 한 할머니도 이상하게 마음을 편치 않게 하지만 목소리가 차량 저쪽까지 들리도록 크게 하는 할아버지께는 눈총을 쏘고 싶다. 어떤 날은 정치나 시국에 대한 비판을 주변 승객들 들으라고 큰소리로 하는 분을 만난다. 그 말 가운데 욕이 섞이면 도중에라도 내리고 싶어진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거야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이지만 사견을 공공의 자리에서 말하면서 욕까지 섞어서 하면 공감을 사기는커녕 반감을 산다는 것을 왜 모를까.

옆 사람에게 억지로 대화를 청하는 분도 있다. 술을 걸친 그분의 몸에서 술과 안주 냄새가 강하게 풍겨오면 내심 불쾌감이 솟는다. 단체로 등산을 하고 귀가하는 도중에 술을 좀 드셨는지 여러 노인이 한꺼번에 지하철을 타고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며 웃는 것을 볼 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내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에티켓은 젊은이들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노약자석이 비어 있을 때 앉기를 권하는 노인이 있다. 나는 그분에게 고개를 숙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앉는다. 작은 친절을 베푼 그 노인을 우러러보게 된다. 눈감고 묵주를 돌리며 마음속으로 기도문을 외거나 책을 보며 가는 노인에게 나는 외경심을 갖게 된다. 아기를 안고 앉거나 유모차에 태우고 앉은 새댁에게 덕담을 건네는 노인의 모습도 보기에 좋다. 의복도 값의 고하에 상관없이 단정하게 입는 분이 있는가 하면 후줄근하게 입는 분이 있다. 나의 입성이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음을 모르는 노인분들이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여학생이 한 무리 탔는데 웬 노인이 한 여학생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노인은 술을 좀 드셨는지 낯빛이 붉었다. 질문의 내용이 조금은 위태로웠다.

“키가 다들 큰데 지금 몇 학년이니?” “요새 애들 영양상태가 참 좋단 말이야. 옛날 같으면 고삼으로 봤을 키인데 중삼이구나.”

여학생들이 먼저 내려 질문 공세가 그 정도에서 멈추었기에 망정이지 사람들이 많이 탄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질문을 하는 것이라 내가 다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이 땅의 노인은 나이만으로 아랫사람의 대접이나 존경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노인이 많아지면 젊은이들은 공짜 승차를 하는 노인분들을 편치 않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같은 세대 노인을 대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말도 조심해서 하게 되지 않을까. 젊은이들도 노인분에게 말을 건네거나 대답을 할 때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 예의를 갖춰서 하는 말은 바로 나 자신의 인격을 높이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승하 < 시인·중앙대 교수 shpoem@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