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깡패·졸부 연기에 너무 쏠린 영상문화…지성파 배우 키워 분위기 확 바꾸겠다"
임진년을 여는 원로배우 이순재 씨(77)는 여전히 왕성한 현역이다. 노인들의 러브스토리를 담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로 흥행에 성공했고 요즘에는 MBC 주말극 ‘천번의 입맞춤’에서 깐깐한 성품의 회장 역으로 출연 중이다. 오는 7일부터 명동 예술극장에서 연극 ‘돈키호테’의 주연으로 나서며 3월부터 미니시리즈 ‘킹’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올해에는 후학 양성에 힘을 더 쏟을 계획이다. 석좌교수로 13년간 몸담은 세종대 를 떠나 그가 가천대 연기예술과 석좌교수로 옮겨 강단에 서는 것.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가천대에서 연기예술과를 신설하면서 자문을 구해왔어요. 이길여 총장의 교육 의지가 뚜렷하다고 판단돼 수락했지요. 저학년생을 대상으로 ‘화술훈련’을 시킬 생각입니다. 요즘 젊은 배우들은 저급한 깡패 역은 잘하지만 지성적인 사회 지도층 역은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요. 배우에게 화술은 원천적인 문제예요. 말의 정형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도록 직접 들러붙어 가르칠 겁니다.”

그는 사극의 대신 역을 보면 어쩐지 모두 ‘상놈’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옛날 대신들은 사서삼경에 통달한, 높은 식견의 소유자들이었고 무장들도 문무를 겸비했던 지적인 사람들이었는데 배우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

“배우 지망생들은 작품의 이해력을 높이고 지적 표현을 훈련해야 합니다. 가령 셰익스피어 극의 수준 높은 대사의 함축적인 내용을 알면 일상드라마는 쉽게 해결됩니다. 트렌드가 변한다 해도 표준어의 기본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죠. 연기는 이론이 아니라 반복적인 훈련으로 능수능란해질 수 있습니다. 1, 2학년 과정을 마치면 말을 제대로 할 줄 알도록 할 겁니다.”

이처럼 명확한 교육 방침은 세종대 석좌교수 경험에서 나왔다. 그는 주 4시간짜리 실습 프로젝트를 하면서 학사관리를 엄격하게 했다.

“수업을 빼먹으면 톱스타라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어요. 드라마 ‘에덴의 동쪽’에 출연 중이던 한지혜에게도 C학점을 줬어요.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고 했더니 그도 흔쾌히 받아들이더군요.”

그는 수억원을 받고 드라마에 출연하는 한지혜를 보더라도 배우들의 위상은 격상됐다고 말했다. “예전의 배우들은 두 가지 핸디캡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선 경제적으로 궁핍했어요. 톱스타 김진규나 최무룡 등도 말년에는 어렵게 살았어요. 사회적 인식도 최악이었어요. 1990년대 초 제가 국회의원을 할 때 방송 출연을 금지시키더군요. 법조계 출신 의원들에게는 변호사업을 허용하면서 말이죠. 방송 출연 여부는 도덕적 개념이지 법적 문제는 아니지요.”

그러던 배우들의 위상은 2000년대 들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여기저기서 홍보대사로 와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고소득자도 많아졌다. 황정음이 시트콤 ‘하이킥’에 처음 출연할 당시만 해도 통장에 수십만원뿐이었지만 종영 무렵에는 10억원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시대에 그런 ‘기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호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배우의 수명이 얼마나 오래가느냐는 어떤 목적으로 이 바닥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외모를 밑천삼아 돈벌이를 하느냐, 예술적 창조자가 되기 위해 일하느냐가 그것이죠. 배우를 평생 하려면 예술적 창조자란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저도 굶더라도 예술적 창조자가 되겠다는 각오로 지금까지 일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광고에 출연하면서 드라마와 영화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는 톱스타들도 질타했다.

“그것은 연기자와 배우의 자세가 아닙니다. 배우는 끊임없이 작품에 출연해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체됩니다.”

서울대 철학과 시절이던 1956년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그는 영화와 방송드라마, 연극 등 300여편에 출연했다. MBC 명예의 전당과 KBS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