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농업은 언제나 시장개방의 '보호대상'이었다. 새롭게 열리는 해외 시장으로 뻗어나갈 기회를 노리기보다는 외국산 농산물이 국내 농업을 초토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했다. 정부와 정치권 모두 '농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주창하기보다는 '피해보상 확대' 대책을 마련하는 데 골몰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앞두고 농업에 1조7000억원가량의 예산을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구멍 난 항이리에 물 붓기 식 지원보다는 '강한 농업'을 키우는 쪽으로 농업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실효성 낮은 농업 피해보전 대책

김영삼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되기 1년 전인 1992년 "10년간 62조원을 농업 피해 보전 및 경쟁력 강화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김대중 정부는 2003년까지 42조원을 투입하는 '농업농촌발전계획'을 1999년 발표했고,노무현 정부는 한 · 미 FTA 협상 타결에 따라 2004년부터 2013년까지 119조원을 지원하는 '농업 · 농촌대책'을 내놓았다.

문제는 정부의 농어업 지원대책의 대부분이 농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현금성 보전과 지원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민간 농업연구소 GS&J의 이정환 이사장은 "농업 피해 보전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농업 체질 강화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 농업의 경쟁력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 농림어업총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농축수산물 판매금액이 1000만원 미만인 농가는 67.8%에 달했다. 2005년(68.3%)과 비슷한 수준으로 영세 농가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농림어업 인구는 2000년 445만명,2005년 393만1000명,지난해 349만9000명으로 계속 줄었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농어업 소득만으로 가계비 충당은 물론이고 신규 투자까지 가능한 농가를 만들겠다던 과거 정부들의 계획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농업 지원 2조5000억원 추가

[한ㆍ미 FTA 통과 이후] 농업 지원금 대부분 '피해보전' 초점…자생능력 못 키워
정부는 한 · 미 FTA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농업 지원 규모를 지난 8월 발표한 22조1000억원보다 1조7000억원 많은 23조8000억원으로 늘려 잡았다. 세제 지원도 2000억원에서 1조원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재정과 세제 지원을 합하면 2조5000억원가량이 더 늘어나는 셈이다. 여기에 면세유 공급과 영농기자재 부가세 감면 등 간접적인 세제 지원까지 포함하면 실질적인 농업 지원 규모는 53조6000억원에 달한다.

정부 관계자는 "농업 피해 보전보다는 경쟁력 강화에 지원 예산의 대부분을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미 편성된 22조1000억원의 대부분이 농산물 경쟁력 강화나 체질 개선 등에 쓰이기로 돼 있다는 것이다. 농민에 대한 직접적 피해 보전 예산은 1조3000억원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소득보전 등 피해보상 확대 가능성

문제는 국회 논의 과정에서 농어민 피해 보전 위주로 예산이 바뀔 가능성이다. 농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보다는 농민에 대한 현금성 지원이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익주 기획재정부 무역협정국내대책본부장은 "내년 농어민에 대한 순수 지원금액만 3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며 "구조조정과 경쟁력 강화가 물론 중심이 돼야 하지만 당장의 어려움을 외면하기도 힘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부 농민들과 단체들은 이번 기회에 그동안의 숙원 사업을 모두 처리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내년 균형재정에 무게를 두고 있는 정부로서는 풀기 어려운 문제다.

박환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에서 관행처럼 돼 있는 농어민 소득 보전 등 보조금은 WTO 등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는 사안들"이라며 "일시적인 손해 보전이나 민심 잡기용 지원은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