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리에에 들어서자 미완성 폭포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곳곳에 널려 있는 물감 원액과 화구들.조금만 한눈을 팔면 바지며 외투가 물감 투성이로 변해 버리는 작업실.그곳에 '거꾸로 안경'을 쓴 그가 있었다. 그의 안경테는 아래위로 뒤집어 놓은 형태다. 보통 사람과 다른 역발상의 메타포랄까.

화가 사석원 씨(51).그는 여러모로 별쭝나다. 몇 년 전 금강산 산수화 '만화방창' 전시회 때 사전 매진으로 화제를 모았고,지난해에는 아프리카 현장의 강렬한 색채를 입힌 '하쿠나 마타타'로 주위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엔 거대한 폭포 그림에 푹 빠져 있다.

"지난해 전국의 폭포를 찾아 100군데쯤 다녀왔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폭포의 소리를 그리고 싶었어요. 소리를 그리려면 물이 많아야 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다행이었죠.소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용이 날아가는 것 같은 그 소리를 그리고 싶어요. 폭포를 타고 승천하는 용의 기세,산수화에서는 기운생동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


그는 고흐처럼 물감 원액을 많이 쓰지만 이번 그림에서는 변화를 더 주고 싶다고 말했다. "유화로 그리는 산수화이긴 한데 폭포마다 다를 것 같아요. 어떤 건 강렬하게,어떤 건 섬세하게….지금도 모색 중이에요. 작년에는 볼 때고 지금은 실제로 그릴 때니까요. 며칠 후에도 불일폭포를 보러 가는데 전에도 가봤지만 눈이 내렸을 때 꼭 가보려고 해요. "

최근에 약 3개월간 제주도에 머물렀던 그는 "제주도 한라산에 있는 엉또폭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보통 때는 물이 없다가 100㎜ 정도 비가 오면 어마어마한 폭포로 바뀌고 며칠 후면 말라 버리는 폭포."사는 게 이런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폭포의 모양만 보면 금강산에 있는 구룡폭포가 멋있어요. 동해안 쪽 폭포가 확실히 좋은 거 같아요. 바위가 달라서 그런가 봐요. 서쪽 산들이 둥글둥글하다면 설악산을 비롯한 동쪽 산들은 뾰족뾰족하잖아요. 그래서 긴장감이 있습니다. "

그는 내년에 폭포 그림 전시회를 열 생각이다. 그 다음엔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그림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부드러운 이미지와 달리 그의 열정은 갈수록 뜨겁고 관심 영역도 더 넓어지고 있다. 어디에서 나오는 힘일까.

그는 어릴 때부터 병치레를 하도 많이 해서 일곱 살이 되어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루에도 소아과에 서너 번씩 가고,종합선물세트처럼 병을 달고 지냈다고 하더라고요. 부작용 때문에 말을 늦게 배웠다더군요. 자연히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방바닥에 엎드려 낙서만 하면서 보냈죠.아버지는 사법시험 준비하느라 늘 공부만 했고 어머니가 양장점을 시작했는데 저는 재단하는 어머니 옆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달력을 보고 그렸는데 제가 제일 좋아한 게 그때는 몰랐지만 고흐의 풍경화들이었어요. "

물감 원액으로 그린 고흐의 작품 질감과 두께감이 다르듯이 그의 그림도 그 영향을 받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화가의 존재감을 제대로 느낀 것은 몇 년 뒤였다. "막내고모 집에서 본 책 중에 '플란더스의 개'가 있었어요. 주인공이 성당벽화를 보며 죽는데 그 그림이 루벤스의 작품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화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죠.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

그는 6학년 때 할머니가 연 탁구장에서 손님들과 놀다가 중학교에 가서는 아예 탁구선수로 활동했다. "교내에서는 실력이 두 번째 정도였는데 시합에 나가면 항상 1등을 했죠.그러다 시력이 급속히 나빠졌어요. 2.0에서 1.5로 다시 0.4로….결국 운동을 포기했지요. 고등학교는 겨우 들어갔습니다. 공부에 취미가 없었어요. 하긴 초등학교 다닐 때도 숙제를 한번도 안 해서 무지하게 맞았죠."

그가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너는 어릴 적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니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떠냐"며 "한국화가 거의 불모지에 가까우니까 앞으로 할 게 많고 한국인 체질에도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곧바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서울미술학원으로 달려갔다. 입시생뿐만 아니라 대학생들도 졸업작품 때문에 많이 오는 학원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대학생들과 더불어 동양화 공부를 시작했다.

문제는 대학입시와 전혀 관련 없는 문인화와 산수화에 미쳤다는 것이었다. "비중경만곡증이라는 게 저희 가족 유전이죠.코 속에 뼈가 7개 있는데 그중 3개가 휘어졌어요. 수술을 받고 누워 있는 동안 계속 산수화 생각만 나는 거예요. 밤에 몰래 빠져 나가 학원 관리 아저씨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해서는 밤새 그림을 그렸죠.그러다 수술자리가 터져 피가 나고,통금이 풀린 다음 병원에 가서 혼나곤 했죠."

대학 입시에 낙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듬해 서울대 입시에서도 물을 먹었다. 그러다 동국대에 입학해서는 '정말 잘 들어왔구나'를 연발했다. "고구려 시대 이후 1200년 이상 우리나라 문화의 큰 축인 불교문화재를 비롯해 기라성 같은 교수님들이 많았어요. 입학 직후 5 · 18 때문에 어수선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그림에 몰두했고 1학년 때부터 대학미전에서 4차례 연속 수상했어요. 지금까지도 대상을 비롯해 상을 네 번이나 받은 학생은 없다고 하더군요. "

그는 졸업하자마자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때 상금이 500만원이었다.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마침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싶었던 꿈이 저절로 이뤄졌다. "유학 시절 두 가지 좋은 경험을 했죠.지금은 작고한 박생광 화백의 회고전이 파리 그랑팔에서 대규모로 열렸어요. 큰 대문만한 포스터가 파리 시내 곳곳에 붙어 있었죠.한국 화가로서 어찌나 자부심이 생기던지….또 하나는 세계미술품 견본시장이 해마다 파리에서 열렸는데 한국에서는 가나화랑이 왔어요. 제가 본 건 최종태 선생님 작품이었어요. 가나화랑과의 첫 인연이지요. "

파리에 있을 때 군면제 소식도 전해들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문화 분야 병역특례 혜택을 늘렸는데 미술대전 대상 수상자인 그가 첫 대상이었다. 그 제도는 금방 없어져서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 수혜자였다.

그 무렵 어머니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고 돈도 떨어져 귀국을 생각했다. 귀국할 여비가 없어 고민하다 한국 대사관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갖고 그 수입으로 겨우 돌아왔다.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어요. 할 수 없이 고액 과외를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1년 만에 빚을 다 갚았죠.그리기보다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1년쯤 지내다 '어,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어 본연의 화가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죠.이후 고생길이 또 시작됐지요. "

1년 내내 그림에 미쳐 지내는 동안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졌다. 그때 파리에서 본 가나화랑이 생각났다.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찾아갔지만 사장이 없어서 자료만 놓고 왔다. 보름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또 찾아갔다. "지금 회장이신 당시 이호재 사장이 한국에 잘 없었는데 그날 마침 있었어요. 사진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며 원화를 볼 수 없겠냐고 해서 다음 날 용달에 작품을 싣고 갔어요. 갈 용달비는 있었지만 돌아올 비용은 없었죠.팔리지 않으면 인사동에 버리고 올 생각으로 갔습니다. 마침 박대성 선생님이 놀러오셨는데 사장님이 박 선생님과 얘기를 하고 나오더니 그림을 다 인수하고는 전속계약까지 맺었죠.잊혀지지도 않아요. 1988년 3월이었어요.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었죠."

그때부터 그는 더욱 그림에 전념했다. 정식으로 화가가 됐으니 전시회를 해야 하는데 당시 가나화랑에는 워낙 거물급이 많았기 때문에 초짜 화가가 전시회를 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호재 사장이 소개해준 것이 송원화랑(지금의 노화랑)이었다. 1989년 송원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전시 3개월 전에 어머니가 쓰러졌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갔으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제겐 등대 같은 존재였는데 첫 개인전도 못 보고 돌아가신 거죠.어머니는 좀 특이했어요. 야단치거나 뭘 강요하는 게 없었어요. 평생 두 번 혼났는데 일곱 살 때 욕을 하다가 그랬고 한 번은 사탕을 훔쳤다가 혼쭐이 났죠.그걸 빼면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놔뒀어요. 꼭 하실 말씀이 있으면 편지를 써서 책상 위에 놓거나 했죠.소설가 박완서 씨와 탤런트 고두심 씨를 섞은 것 같은 이미지였어요. "

만난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