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목동아파트에 전세로 사는 전업주부 양모씨(41)는 가계부만 보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간다. 초등학교 4학년과 중학교 2학년 두 아들을 둔 양씨 가족의 수입은 중소기업 간부인 남편 김모씨(45)의 월급 421만원이 전부다. 남편 월급이 작년보다 10만원 올랐지만 구멍 뚫린 가계부를 메우기가 힘겹다. 전셋값 일부를 매달 월세로 내는 반(半)전세로 전세 계약을 맺은 게 이유다.

◆월세 탓에 멀어진 내집 마련

양씨는 작년 10월 이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가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저축도 어느 정도 하고,전세금에 약간의 대출을 보태면 몇 년 후 내집 마련이 가능할 것이란 희망도 가졌다. 작년 9월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전셋값은 양씨의 희망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반전세 계약으로 작년 11월부터 꼬박꼬박 나가는 월세(30만원)와 대출금 이자(31만원)는 적잖은 부담이다. 2년 새 1억8000만원에서 2억8000만원으로 1억원 오른 전셋값을 대느라 연리 7.4%의 금리로 5000만원을 빌리고 나머지를 월세로 돌린 데 따른 것이다.

빠듯한 생활비 탓에 학원비를 줄였지만 사교육비는 여전히 가계를 짓누르고 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첫째는 영어학원(월 30만원) 수학학원(30만원) 중국어학원(25만원) 국어학원(12만원)을 다닌다. 과목을 줄이고 저렴한 학원을 골라도 월 100만원에 가깝다. 국 · 영 · 수 · 중국어를 제외하고도 과학 한자 등 3~4개를 기본으로 더 배우는 주변 또래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여유가 없어 아직 초등학생인 둘째는 수학(20만원) 영어(18만원) 두 과목만 학원에 보낸다. 부족한 과목은 월 10만원짜리 '인강(인터넷 강의)'을 활용한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휴대폰은 가급적 수신용도로만 사용하고 외식도 자제하고 있지만 생활비를 더 이상 줄이기는 어렵다. 한파에 구제역까지 겹쳐 배추 무 같은 채소류와 우유 돼지고기 등은 값이 1년 새 최고 두 배나 뛰었다.

양씨는 "더 나은 교육 여건을 찾아 이사한 만큼 첫째가 고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목동에서 버틸 작정"이라며 "허리띠를 졸라매느라 가계부가 누더기로 변했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집도 없고 저축도 못해 국민연금 이외에는 뾰족한 노후대책이 없다는 점"이라고 하소연했다.

◆외곽 떠도는 전세유민 속출

힘겨워도 생활 터전을 지킬 수 있는 양씨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너무 오른 전셋값 탓에 외곽으로 나가는 '전세 유민(流民)'이 적지 않다.

2009년 7월 판교신도시 봇들마을 전용 85㎡로 이사했던 박영진씨(51 · 자영업)는 전세 재계약을 6개월 남겨두고 있지만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전셋값이1억9000만원에서 최근 3억5000만원으로 뛰어서다. 올봄에 고3이 되는 아들의 통학거리가 크게 멀어지지만 1억6000만원을 도저히 구할 수 없어 전셋값이 싼 용인 외곽으로 나가야 할 처지다. 박씨는 "내 수입으론 전셋값을 따라잡을 수 없어 이러다간 수도권 외곽지역 전셋집을 전전하는 '변두리 인생'으로 전락할까 두렵다"고 토로했다.

◆허물어지는 중산층 기반

전문가들은 확산되는 반전세가 단순히 주택 문제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주택임대 시장에서 반전세 물건이 크게 늘고 월세 금액이 높아지면 가처분소득이 그만큼 줄어들어 '내집 마련→집값 차익 발생→중산층 진입'이라는 전통적인 흐름이 단절된다는 점에서다. 신혼부부나 사회초년병 등은 자본 축적 기회를 잃게 돼 중장기적으로는 소비 및 경제활동이 위축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김호철 단국대 도시계획 · 부동산학과 교수는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등 취업난의 여파로 '88만원 세대'라고 지칭되는 젊은 세대가 소득의 상당 부분을 월세로 내면 부를 쌓기가 힘들어진다"며 "이로 인해 경제성장도 정체될 수 있어 종합적인 전세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김태철 기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