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교육을 받고 나니 은퇴 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

2007년 말 삼성그룹 계열사인 에스원에서 퇴직한 박재석씨(55).50대 초반에 은퇴한 뒤 한동안 멍했다. 1년여 동안 여행하고 등산이나 독서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 동영상에서 함께 퇴직한 회사 선배가 은퇴설계 교육을 받고 있는 걸 봤다. "노느니 나도 한번 참석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교육이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그가 은퇴설계 교육을 받은 곳은 희망제작소 행복설계아카데미.교육을 받은 뒤 인생관이 변했다. 은퇴 5년 전부터 구상해 놓았던 사업도 미련 없이 접었다. 지금 그의 직함은 한국여성재단 경제사업팀 부단장.여성재단에서 추진하는 저소득층 마이크로크레디트(소액대출사업)와 보육사업을 하고 있다.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회사 생활하고,돈 많이 벌고,경쟁하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 행복이 돈 문제가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

박 부단장은 회사에 다닐 때 막연히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행동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 직장인들처럼 시간에 쫓겼고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행복설계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나니 새로운 길이 보였다. 인생 후반기를 다시 생각하게 됐고 이제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박 부단장은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여성재단에 배치돼 6개월간 인턴생활을 했다. 작년 초 정식 직원이 됐다.

박 부단장은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즐겁고 정말 보람 있다"며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여성들 사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면을 너무 따지기 때문에 은퇴 후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 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는 것을 꺼리고 은퇴 전에 자신이 했던 일과 너무 다르다며 거리를 둔다는 설명이다. 박 부단장은 "자기 분수에 맞게 사는 게 좋다"며 "은퇴 후에도 골프 치고 좋은 음식 먹고 은퇴 전 누려왔던 걸 놓치기 싫어하다가는 쪽박 차는 수가 있다"고 말했다.

◆잘하는 일 살리면 더욱 보람

박 부단장은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젊은 여성들과도 일한다. 여성재단 상근자 17명의 평균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다. 은퇴한 후 젊은 사람들과 일하다 보니 어려운 점도 있다. 그는 "무엇보다 은퇴한 사람들은 윗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젊은이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일하는 데 적응하는 게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닌데 일은 많고,사람 수가 적다 보니 급한 일이 있으면 함께 달려들어서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은퇴 전까지 맡았던 영업과 마케팅 업무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 컨설팅을 할 때는 영업 특기를 살려 어떻게 하면 손님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는지 얘기해 주고 상권 분석이나 재무 분석까지 해준다. 하지만 이런 경험 외에 워드작업 등 기본적인 업무 능력도 필요하다.

박 부단장은 "다른 사람에게 워드 쳐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워드나 엑셀에 취미가 있어서 배워둔 게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박 부단장 이전에도 5~6명이 여성재단에서 인턴으로 일했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는 "평소 자신이 특별히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잘 준비할 필요가 있다"며 "그림이나 사진 글쓰기와 같은 일도 사진 봉사,객원 기자 등으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은퇴 후 일이 정규직-비정규직-봉사직 순으로 나뉘는데 자신의 재능과 능력에 맞는 일을 잘 찾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기본적인 경제력과 건강은 있어야

아무리 남을 돕는 일이 삶의 보람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경제력과 건강이 있어야 가능하다. 다행히 박 부단장은 노후생활 수단을 마련해 놨다.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을 합해 월 150만~160만원 정도의 수입이 생길 예정이다. 은퇴 때 친구 3명의 부인들이 함께 시작한 자영업도 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다. 현역 때처럼 골프를 치지는 못하더라도 일상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 수준이다. 박 부단장은 "대출이 없어 이자부담을 지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며 "현금이나 금융자산은 많지 않지만 정 안되면 한 채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역모기지론을 빌려 생활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건강관리에도 열심이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매주 주말에 등산을 한다. 평소에는 부인과 산책을 즐긴다. 최근에는 권투에 도전해 보려다가 무리인 것 같아 포기했다고 한다.

박 부단장은 마지막으로 여성재단 등 비영리단체에 많이 기부해 달라는 말을 꼭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렇게 인터뷰하는 게 내 자랑하려고 한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기부를 늘렸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며 "여성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은 남성 대출보다 회수율이 훨씬 높고 보육사업은 여성인력을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 현역시절의 '영화'를 깨끗이 잊고 제2의 인생에서 삶의 보람을 찾은,행복하고 건강한 노후생활을 느낄 수 있었다.

정재형 기자 jjh@hankyung.com


◆ 특별취재팀

경제부 하영춘 차장(팀장), 강동균, 정재형, 유창재, 이상은, 이호기, 이태훈 기자
증권부 서정환 기자, 사회부 최진석 기자, 건설부동산부 박종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