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내 돈은 안 갚고 술 값은 '펑펑'…상사라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김 과장은 입사 동기에게 빌려준 결혼자금 200만원을 3년째 받지 못하고 있다. 동기가 결혼 6개월 만에 이혼했기 때문이다. 이혼한 사람에게 돈 얘기 하는 것이 멋쩍어 지금까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김 과장을 더욱 열받게 하는 것은 동기의 뻔뻔함이다. 깜빡 잊은 척 태연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김 과장의 눈빛을 자꾸만 피하는 건 분명히 '과거'를 기억한다는 증거다. 그게 더 얄밉다.

절친한 사람과는 돈거래하지 말라는 불문율 아닌 불문율은 직장동료들 사이에서도 적용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돈거래다. "딱 1주일만 쓰고 돌려줄게"라며 숨 넘어갈 듯한 표정을 짓는 동료를 외면할 수 있는 직장인은 많지 않다.

◆돈은 미워해도,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외국계 홍보회사 4년차 사원인 박모씨(28)는 요즘 속앓이가 심하다. 1년 전 "급하게 부모님 수술비가 필요하다"며 부탁하는 팀장에게 500만원을 빌려준 뒤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어서다. '돈 갚으세요'란 소리가 입술 끝에 걸려 있다가도 팀장의 기막힌 처세술에 도로 삼켜버린 적이 한두 번 아니다. 빚 갚으라는 소리가 목에서 딱 튀어나올 때를 어떻게 눈치챘는지,그때마다 팀장은 어김없이 밥을 사며 "내가 빚 떼어먹을 사람 아닌 거 잘 알지.조금만 기다려라.사정이 안좋다"고 달랜다.

팀장은 후배 서너 명이 먹은 20만~30만원 정도의 술값은 인심좋게 펑펑 내주곤 했다. 하지만 박씨 돈은 갚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도 모시고 있는 팀장인데 어쩌랴.그저 팀장이 로또라도 당첨돼 돈 갚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

공기업에 다니는 이모씨(43)는 외환위기 직후 홍역을 치렀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연대보증이 문제가 됐다. 회사 동료가 신용대출을 받는데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해 왔다. 대출금은 2000만원.마음 약한 이씨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 터졌다. 동료는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서 수억원의 신용대출을 받았다. 금리가 오르자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만 야반도주했다. 이씨처럼 연대보증을 섰다가 빚을 떠안은 사람만 10명이 넘었다. 이 말을 들은 이씨의 부인은 "월급쟁이에게 2000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줄 아느냐"며 이혼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마음 약해지면 지는 거다"

공기업에 다니는 유모씨(27)는 신용카드 한 번 잘못 빌려줬다가 옆자리 동료와 완전히 틀어졌다. 업무 틈틈이 인터넷쇼핑에 열을 올리던 동료는 어느날 유씨에게 "XX카드 혹시 있어?"라고 물었다. 지금 카드사 행사 중이라 해당 카드로 결제하면 할인받을 수 있으니,카드를 빌려주면 점심시간에 돈을 찾아 바로 돌려주겠다는 말이었다.

유씨는 그 자리에서 OK했다. 할인 받아 쇼핑하는 재미를 유씨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유씨는 자신의 컴퓨터로 인터넷 쇼핑몰에 동료 아이디로 로그인해 대신 결제해 줬다. 금액은 5만원 정도.그러나 웬걸."금방 줄게"라고 말했던 동료는 깜깜무소식이었다.

마음 약한 유씨는 대놓고 말도 못하고 1주일 동안 전전긍긍하다 "전에 대신 카드결제한 돈…"이라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동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그날 바로 출금해서 줬잖아"라고 쏘아붙였다. 구체적인 정황을 지어내는 모습에 기가 찼지만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마음이 든 유씨는 결국 돈을 포기하고 말았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진모 대리(34)가 모시고 있는 차장은 진국이다. 사람도 좋고 마음도 따뜻하다. 후배들에게 저녁도 자주 산다. 문제는 건망증이다. 차장은 툭하면 "어이,진 대리 2만원만 빌려줘.당장 현찰이 없네"라며 돈을 빌린다. 그리곤 다음 날 곧바로 갚곤 한다. 하지만 다음 날 갚지 않으면 깜깜무소식이다. 갚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 같다는 게 진 대리의 분석이다. 이런 식으로 1만원,2만원,3만원씩 빌려준 돈이 상당하다. 진 대리만이 아니다. 다른 동료들도 그렇다. 그렇다고 마음 좋은 차장에게 "2만원 갚으세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차라리 떼인 셈 치는 게 마음 편하다.

◆부인 핑계가 최고

국내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정모 과장(38)은 돈거래에 관한 한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남에게 빌린 돈은 무조건 정해진 기한을 넘기기 전에 갚는다. 반대로 자신에게서 돈을 빌려간 사람이 약속된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 과장은 사람들과 돈거래를 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정 과장의 개인적인 원칙이다. 사내에서 친한 동기나 선후배들이 "돈 좀 빌려줄 수 있느냐"고 애원하면 거절하기 쉽지 않다. 이런 난처한 상황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정 과장이 택한 방법은 전업주부인 와이프에게 모든 경제권을 넘기고,평소 이를 주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는 직장 선후배들과 술 마실 기회가 있으면 경제권을 박탈당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듯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흘린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진 뒤 정 과장은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마다 "와이프에게 한 번 부탁해 보겠다"는 대답으로 넘긴다.

◆난 쿨하게 잊어버려

돈을 빌려줄 때는 무조건 '준 돈'이라고 생각하는 김 과장,이 대리들도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채모씨(28)는 "부모님에게 배운 방법인데 아예 얼마까지 빌려줄 수 있는 한도를 정한 뒤 그만큼은 그냥 '없는 돈'으로 친다"고 말했다. 대학생 때는 20만원,지금은 30만원이 그녀의 '한도'다. 나중에 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돈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받지 못해도 크게 화가 나지 않는다.

남에게 돈을 빌려줬다 떼인 경험이 있는 직장인들은 나름대로의 처세술을 개발하게 마련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모씨(31)는 100만원만 빌려 달라는 동료에게 '설마 그 돈을 못 받으랴'며 선뜻 내줬다가 1년이 넘도록 받지 못한 경험이 있다. 그는 "보통 빌려 달라는 사람은 내게만 말하는 게 아니다"며 "여기저기서 꾸었으니 총액은 100만원이 아니라 수천만원이 됐던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 뒤론 빌려주기 전에 상대가 타진했을 만한 다른 사람들에게 넌지시 운을 떼 봐서 전체 빌린 돈 규모를 짐작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했다.

◆설마 내가 아쉬운 소릴 할 줄이야

인생을 살다 보면 거꾸로 돈을 급히 빌려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민모씨(35)는 올해 집안에 여러 우환이 닥친 데다 전셋값도 5000만원이나 올려주게 되면서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저축이 많지 않던 그는 일단 마이너스 통장과 카드로 돈을 쓴 뒤 친구와 동료 등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렸다. 민씨는 "아쉬운 소리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며 "동료들끼리 내 뒷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엔 정말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 토로했다.

이정호/이관우/김동윤/이상은/이고운 기자 dolp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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