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 "분노·공포·불안…모두 물방울 속에 녹여 無로 보내는 거야"
북한산 자락의 평창동 언덕.나뭇잎 사이로 초가을 햇살이 반짝이는 숲 속에 화가의 집이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서 계단을 내려가니 널찍한 아틀리에가 나온다. 어른 키보다 큰 캔버스가 셋,그보다 작은 게 서넛,아직 물기가 덜 마른 초벌 패널까지….작업실 전체가 거대한 화폭 같다.

'물방울 작가'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81).여든에 얻은 손자 얘기에 연신 홍조를 띠며 소년처럼 미소짓는 노화가. 손자 이름은 이환이라고 했다. 김이환.아직 두 살도 되지 않았다. 회춘(回春)이란 이럴 때 딱 맞는 말이다. 화가의 표정이 갓난 아기 같다. "말할 수 없이 좋아요.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죠."

물방울 작업의 주제가 '회귀'여서 그럴까. 그가 처음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약 40년 전이었다.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적인 작품을 거쳐 파리의 권위 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에서 물방울 작가로 데뷔한 때가 1972년.

그로부터 10여년 후 그는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라고 자신의 작업을 설명했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가 곧 물방울 작업"이라는 것이다.

1986년 이후 천자문을 활자체나 서예체 형태로 화면 바탕에 깔고 물방울과 조화시킨 뒤에는 그 의미가 더 깊어졌다. 물방울들은 문자 위에 영롱하게 맺히면서 허(虛)와 실(實),음과 양,무한과 유한의 사상과 어우러졌다.

"천자문은 할아버지에게 배웠죠.종이를 아끼기 위해 연습한 글씨 위에 수없이 반복적으로 겹쳐 쓰면서 서예 공부를 하던 그때가 생생해요. 할아버지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공부를 해서 만인지장이 돼야 할진대 그림을 그린다니 당치도 않다'며 야단을 치셨지만…."

화폭 바탕에 깔린 한자들은 천자문에서 부분 부분 추출한 글자들이다. '벌'이나 '죄' 같은 글자는 빼고 좋은 뜻을 지닌 글자만 골라 쓴다고 했다. 근작들에 노란색과 황금색이 유독 많은 건 "인생의 가장 황홀한 황혼기이자 황금기가 지금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20여년 전부터는 '회귀'를 표제로 한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그렸다. 영롱하게 맺히던 물방울이 때로는 지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흘러내리듯 변한 것.이는 오랜 기간 타국 생활에서 온 향수와 먼 과거로부터 되살아나는 천자문 위에 물방울이 겹친 결과가 아닐까.

"이번 전시의 제목도 '회귀'인데 이걸 작품 제목으로 정하기 시작한 건 환갑이 지나면서부터였어요. 환갑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는 시점인 만큼 그걸 지나면 다시 태어나고,또 새로 시작하고,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

그는 "물방울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7~8m 떨어져서 봐야 가장 좋다"고 했다. 물방울의 형체가 멀리서 볼수록 살아나기 때문이다. 사실 물방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림자다. 그 덕분에 물방울의 느낌이 완벽하게 살아난다.

"초창기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프랑스 신문지 위에 그렸어요. 활자 위에 물방울을 그려넣으면 더 투명한 느낌이 살아나지요. 흰 종이 위에 그리는 것보다 좋아요. 후에 이것이 캔버스로 바뀌었죠."

그는 물방울 작업에 몰두하기 직전의 작품 중 한 점을 보여줬다. 제목은 '밤에 일어난 일'이다. 온통 검은 바탕에 물방울이 딱 하나 그려진 작품.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냥 각자의 마음에 따라 그림을 보면 돼요. 상상력이 거기에 있죠.슬픈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눈물처럼 보이기도 하고,에로틱한 상상을 하는 사람에게는 또 그렇게 보이고 · · · ."

큰 물방울 말고 자그마한 물방울을 무수히 그릴 때에도 똑같은 생각을 한다. 작은 물방울을 집약해서 그릴 때는 미국 체류 시절 공장에서 넥타이에 무늬를 그려넣기 위해 사용했던 스프레이를 활용하기도 한다.

외국인들은 그의 작품에서 동양적 선의 세계를 발견한다고 한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동양 문화를 일찍부터 받아들여서인지 선불교,도교 등을 잘 이해해요. 노자의 '도덕경'은 번역서만 10권 이상 출간돼 있죠.그래서 동양 문화를 아는 사람들이 물방울을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아요. "

그의 작품이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일본 도쿄국립미술관,미국 보스턴현대미술관,독일 보쿰미술관,한국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삼성리움미술관 등 전 세계 유명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것도 이 덕분일 것이다.

그에게 화가의 길을 열어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식구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제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동의해주셨죠.'언제나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라'고 하시며 격려도 자주 해주셨어요. 사고가 자유분방하고 편지글도 매우 잘 쓰던 명필이셨습니다. "

그가 1976년 현대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작품 판 돈으로 어머니의 산소자리(양평)부터 마련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모든 남자가 그러하듯이 어머니에 대한 마음은 하나님과 동격이지요…."

78세에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하던 중에 그는 한동안 말을 멈췄다.

"반주로 술까지 곁들였는데 어머니 얘기하면 눈물 나잖아….어릴 적 깡촌에서 자라 근처에 의사나 병원이 없었어요. 아플 때마다 나를 업고 집 한바퀴를 돌면서 달래주시던 기억이 새로워요. 서너 살 때 친구와 놀다가 근처에서 집 짓던 목수가 잠시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에 거기 있던 공구로 친구를 때려서 그 친구 어머님이 집에 찾아와 노발대발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어머니께 처음으로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맞은 기억이 나요. "

그의 물방울 얘기는 과거와 현재를 돌아 먼 미래까지 이어지는 '영원의 한순간'처럼 오묘했다. 가장 작고 둥근 물의 방울.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거친 것을 다스린다. 가장 사소한 것만이 아무 흠 없는 것 속에 끼어들 수 있다. 그 속에서 나는 무위의 효율을 본다'는 노자의 깨달음이 그 속에서 출렁거렸다. 오 저 물방울 속에 우주가 다 들어 있다니!

갤러리 현대 강남에서 오는 8일부터 내달 7일까지 열리는 그의 전시회에는 최근작 등 50여 점이 소개된다. 사람 키를 넘는 1000호짜리 2점을 비롯해 500호 1점,300호 4점 등 대형 작품들이 많아 더욱 관심을 끈다.

만난 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69년 파리에 정착, 마구간 화실에서 아내 만나…어릴 때 꿈은 스케이트 선수"

김창열 화백이 런던과 파리,뉴욕을 거쳐 다시 파리에 정착한 것은 1969년이었다. 돈도 없고 인맥도 없던 터라 파리에서 18㎞ 정도 떨어진 교외의 마구간에 허름한 작업실을 마련했다. 마흔 문턱의 동양 남자가 혼자 틀어박혀 붓과 씨름하는 모습은 그것대로 한폭의 그림이었다.

그때 한 여인이 이를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동양인이 프랑스에 혼자 와 마구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꼈을까. "요즘 세상에 이런 남자도 다 있나 싶었나 봐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집사람'으로 발전했죠.마구간은 그 전에 독일인 조각가가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그의 부인이 프랑스인이었죠.그 부인의 친구가 집사람이고…."

4~5년 뒤 파리 시내의 몽파르나스로 작업실을 옮긴 뒤,수많은 유학생과 화가 지망생들이 집으로 몰려들 때도 두 사람의 '마구간 사랑'은 화제가 됐다. 가끔씩 파리를 방문하는 사람들도 이 '예술가들의 둥지'에서 밥을 얻어 먹었다. "손님에게 제일 쉽게 대접하는 방법이 양고기 요리예요. 양 다리에 칼집을 내고 거기에 마늘을 곁들여서 오븐에 구워내면 그만이죠."

그렇게 세월의 더께를 함께 견딘 아내에게 김 화백은 평생 한번도 싫은 소리를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매사에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정말 화가 날 땐 혼자 소리를 크게 한번 지르고 말죠.그러면 금방 말끔해져요. "

그 덕분일까. 지금도 매일 수영을 즐길 정도로 그는 건강하다. 어릴 때 꿈은 뜻밖에도 스케이트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평양에서 자랐는데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친구들이 선수처럼 스케이트를 잘 타는 게 굉장히 부러웠어요. 평양 인근에서 1년에 한 번씩 스케이트 대회가 열렸는데 선수들이 모두 멋진 유니폼을 입고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보기 좋았거든요. 다시 태어난다면 꼭 스케이트 선수가 되고 싶어요.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