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인물열전] (6) 제갈량(諸葛亮)‥군사전략과 행정의 귀재…그러나 자기 과신의 덫에 빠진 자
신상필벌에 엄격하고 관중과 소하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받는 제갈량은 늘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편에 서서 법도를 정비했다. 그는 군량수송 문제로 자신을 속인 유비의 최측근 이엄을 일벌백계해 법치를 실행하고,군령을 어긴 마속을 베 공평무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제갈량은 과연 완벽한 사람이었을까.

진수(陳壽)의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그는 낭야(琅邪) 사람으로 자가 공명(孔明)이며 한나라 사예교위 제갈풍의 후예다. 제갈량은 어려서 아버지 제갈규가 세상을 떠나자 작은 아버지인 제갈현의 보살핌 아래 원술과 유표 사이를 번갈아 가며 몸을 의탁했다.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박릉(博陵)의 최주평(崔州平),영천(潁川)의 서서(徐庶)만이 제갈량과 친교를 맺고 인정해 주었다. 서서의 추천을 통해 삼고초려(三顧草廬)한 유비를 주군으로 삼아 27세의 나이로 세상에 나와 군총사령관격인 군사(軍師)가 되었다.

물고기와 물의 관계라는 유비의 말에서 입증되듯 그는 주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촉나라의 2인자였다. 유비가 황제가 되면서 승상에 올랐던 그는 장비가 죽은 뒤에는 사예교위라는 직책을 겸했으며,유비가 영안(永安)에서 임종할 때 촉나라의 앞날과 아둔한 아들 유선(劉禪)을 부탁한 '영안 탁고(託孤)'는 그의 위상을 말해주는 한 징표다.

정사 《삼국지》의 기록을 보자."만일 후계자(유선)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보좌하고,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취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온 힘을 다해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을 때까지 이어 가겠습니다. " 유비는 또 후주 유선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너는 승상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그를 아버지같이 섬겨라."

스스로 아들의 제위 자리를 대신해도 좋다는 유비의 단호한 어조는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 절대적 신임 그 이상을 의미한다. 제갈량은 오장원(五丈原)에서 사마의와 싸우다가 54세에 죽기까지,사마의로부터 "천하의 기재"란 극찬을 들을 만큼 병법에 뛰어나 팔진도(八陳圖)를 만들었다. 그는 연발식 쇠뇌를 만들었고,목우와 유마까지 만들어 전쟁에 나갈 정도로 기계에 대한 식견도 대단했다.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몸소 마당을 쓸었으며,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간소하게 꾸미고,평소 입던 옷으로 염을 하고,제사용품을 쓰지 못하게 했다. 실로 28년 동안 한 나라를 좌지우지했으나 그의 집 주변에는 뽕나무 800그루와 메마른 땅 열다섯 이랑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아쉬운 점은 남는다. 무모한 북방정벌을 위해 기산(祈山)을 여섯 번이나 원정해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것이라든지,위나라의 오나라 공격에 화해 제스처를 보이는 손권을 부추겨 어부지리를 챙긴 적벽대전을 제외하면 전쟁에서 이긴 것도 별로 없다.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자 일으킨 효정지전(이릉대전이라고도 함)에서도 유비가 완패하도록 내버려 둔 것 등은 신출귀몰한 병법가였는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게 만든다.

또 북벌을 감행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쓴 출사표(出師表)의 행간 곳곳에서 확인되듯,자신의 주군인 유선을 어린아이 취급하며 비의,동윤,곽유지 등 핵심 측근에게 매사를 물어보고 처리하라는 말은 주군에게 할 말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유선은 무려 31년 동안이나 촉나라를 별 어려움 없이 다스렸다. 그러니 무식한 제왕처럼 비친 유선이 기실 제갈량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난 소통적 제왕이었다는 말에 무슨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자기 과신이 오판을 불러일으키고 과대해석을 낳는 법이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기에 우리는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겸허를 배워야 한다.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wjkim@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