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이라는 '날줄'과 지연이라는 '씨줄'로 촘촘하게 얽혀 있는 한국 사회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각종 부탁과 청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원리와 원칙을 앞세워 각종 청탁을 딱 잘라 거절하다보면 어느 순간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는다. 반대로 마지 못해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부탁이라도 들어주다보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수근거림을 감수해야 한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이다. 이 경우에 대비해서 필요한 것이 다름아닌 '거절의 기술'이다.

◆"차사고 난 김에 차 바꿔줄 순 없겠니?"

각종 청탁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사람은 은행이나 보험회사에 다니는 금융인들이다.

은행에 다니는 한모 과장(37)은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먼 친척이 갑자기 전화할 때는 분명히 대출 문제가 끼어 있다"며 "대출 금리를 낮춰 달라거나,대출가능 금액을 늘려 달라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런 부탁을 들어 주려면 지점장하고 상의해 이른바 '지점장 전결'을 이용해야 하는데,영업과 관계되지도 않은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자고 지점장한테 건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보험사 경영 지원 부서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30)는 "업계 상위업체라서 사고가 나면 한두 명은 꼭 우리 쪽 고객"이라며 "친구에,친척에,학교 선후배,동료 등 온갖 라인을 통해 보험금 처리를 잘 부탁한다는 민원이 들어 온다"고 말했다. 김 대리가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부모님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운전에 서툰 어머니가 몰던 차가 벽을 들이받았다. 다행히 어머니는 무사했지만,사고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김 대리에게 "네가 보험사에 다니니 이 기회에 차를 새 걸로 바꿔줄 순 없겠느냐"고 물어 왔다. 김 대리는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님이라도 "그건 안 됩니다"라고 딱 자를 수밖에 없었다.

김 과장,이 대리들을 가장 괴롭히는 청탁은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무리한' 요구를 해 오는 경우다. 사업상 중요한 거래처라든가,상사가 요구할 때 이들은 곤혹스러워진다. 무리한 청탁을 들어주자니 리스크가 크다. 안 들어주자니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 고민스럽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양모 과장(35)은 "3년 전 영업부서에 근무할 때 거래처 건설사인 D사 사장과 식사 중에 무심코 아내가 일하는 회사와 부서명을 밝혔는데,그 사장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그 회사와 거래를 트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회상했다. 양 과장은 이 부탁을 에둘러 거절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거절못해 10년간 고생하기도

밀려드는 각종 부탁과 청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상당하다. 국내 한 증권사 지점에 근무하는 조모 차장(38).그는 증권사 근무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경기도 변두리 전셋집을 전전하고 있다. 10년 전 친구 누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2000년 증시가 한참 달아오를 무렵 친한 친구 누나가 돈을 맡아서 불려 달라고 요청했어요. 부담스러워서 몇 차례에 걸쳐 거절했으나 누나 사정도 딱하고 당시 주식시장이 너무 좋아 수익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지못해 부탁을 들어줬죠."

결과적으로 IT(정보기술)버블이 꺼지면서 2000년을 고점으로 주식시장은 곤두박질쳤다. 조 차장이 운용하던 주식계좌에서도 80% 이상 손실이 발생했다. 돈앞에선 냉정한 게 현실인지라,그렇게 사정사정 부탁한 친구 누나는 그에게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결국 조 차장은 손실의 일부를 매달 일정액씩 할부로 보상해주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대기업 보건 · 안전팀에 근무하는 이모 과장(34).이 과장은 작년 초 꿀처럼 달콤한 유혹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해 꼬인 경우다. 사내 주력 부서인 신성장사업팀의 에이스였던 그는 작년 초 경쟁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경쟁사는 이 과장에게 스카우트 조건으로 팀장 승진과 함께 연봉 30% 인상을 제시했다. 파격적인 제안에 흔들렸던 이과장.불분명한 의사표현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직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보름가량 시간을 끄는 사이 스카우트 소문이 퍼져 나갔다. 결국 자신의 회사에까지 소문이 퍼지면서 이 과장을 대하는 팀원들의 시선이 냉랭해졌다. 뒤늦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소문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으리'였다. 이 과장은 작년 말 인사에서 한직인 현 부서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거절도 기술이다

국내 한 대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우모 과장(35)은 평소 "아무리 터무니 없는 부탁이라도 절대 즉석에서 거절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회사 광고 예산을 집행하는 우 과장에게는 끊임 없는 광고 청탁이 들어 온다. 그럴 때면 우 과장은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뜸을 들인다. 최소 사흘 정도가 지난 뒤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한다. 우 과장은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거절하면 최소한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기분은 덜 나빠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견기업 인사팀에 근무하는 이모 대리(28).일본 어학연수까지 다녀와 사내에선 일본통으로 통하는 그는 그야말로 가욋일에 파묻혀 산다. 요즘 일본 업체와의 사업 제휴가 활발히 이뤄지면서 이 대리를 찾는 사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타부서의 일본어 통 · 번역은 물론 사업서 문구 검토까지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격무를 견디다 못한 이 대리가 최근 터득한 거절의 비결은 바로 명확한 조건 제시다. 일단 부탁을 받으면 "당장은 어렵네요. 대신 ○시간 뒤에 XX정도 도와드리죠","선배님이 ○○ 맡아 주시면 제가 대신 XX를 하겠습니다" 등으로 정중하게 말한다. 이 대리는 "그렇다고 그 많은 부탁이 다 없어진 건 아니지만 부탁의 건수는 많이 줄게 됐다"고 말했다.

◆미리 거절의 그물망을 치는 것도 방법

국내 한 공기업 인사팀에 근무하는 고모 과장(37)은 주변 지인들의 각종 부탁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마다 고 과장은 '업무분장'을 내세워 자연스럽게 거절한다. 채용에 관한 청탁이 들어오면 "승진 담당이라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 승진에 관한 문의가 들어오면 "채용 담당이라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식으로 둘러댄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최모 대리(30)는 회사 내 타부서에서 난감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부탁받으면 "나보다 더 잘 아는 최적임자를 찾아주겠다"는 핑계로 피해 간다. 최 대리는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탁을 처음 받았을 때 흔쾌히 승낙하는 척하면서 절대 내가 하기 싫어서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게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부탁 중 가장 껄끄러운 게 친하게 지내던 사람으로부터 받은 부탁이나 청탁이다. 상대방과의 관계 때문에 단번에 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노하우 중 하나가 자신의 '안티(anti)성향'을 평소에 각인시키는 것.

모 제약업체 광고팀에서 일하는 정모 과장(36)은 "새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꼭 청탁이나 부탁 때문에 회사에서 잘릴 뻔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은연 중에 의식적으로 흘린다"며 "그러면 상대방이 '저 사람은 씨도 안 먹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중에 부탁할 상황이 생겨도 청탁 대상에서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김동윤/이관우/이정호/정인설/이상은/이고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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