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은 고달프다. 재판은 밀려들고 시류는 너무 빠르다. 검사들도 피곤하다. 구정물에 손을 넣어 설겆이하는 곳은 결국 검찰이다. 이승에서 저승사자 노릇을 하다보니 작은 권력에 도취하기도 쉽다. 법조란 원래 그런 곳이다. 위험하고 더럽고 까다롭다. 허공을 떠도는 정의(正義)라는 이름 아래,그리고 잔뜩이나 권위를 강조한 검정색 법복 속에 숨겨진 실로 곤혹스런 소명이다. 세상이 고단해지면 법조도 바빠진다. 지금이 그런 시국이다. 극단적 선택으로 끝난 전직 대통령의 장례가 끝나면 정계와 법조계엔 또 한번 폭풍이 불 것이다.

사법부 독립을 주제어로 내건 젊은 판사들의 모임들이 지난주로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오는 29일 법원장들의 회의가 있다지만 살얼음을 걷기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험하다. 사법 독립이라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다. 우선 판사가 제멋대로 재판하는 것을 독립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골방에 틀어박혀 사법시험에 패스하고 이제 겨우 수련 과정을 끝낸 단독 판사들이 '오로지 재량'으로 국민의 인생과 재산 문제를 판단하는 것을 독립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독립을 우리는 결코 원치 않는다. 임꺽정 판사와 홍길동 법관이 대중 추수적 386식 정의관으로 국민을 재단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저승사자들의 칼춤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법부를 신뢰하는 것은 어느 재판부에서,어떤 판사를 만나건,일관되고 균형잡힌,그리고 납득할 수 있는 적중(適中)의 재판을,신속하게 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만약 사법부 독립을 판사들이 무통제 상태에서 재량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면 재판은 점차 사상과 개성의 경연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판사들의 독립 주장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법률과 양심에 따른다'는 대원칙은 당연히 사법부 전체의 '기관 이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개별 판사는 이 보편적 이성에 기꺼이 동참하는 과정에서 권위를 나누어 갖게 된다.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재판결과가 달라지기 시작한다면 이는 법적 안정성의 종말이다. 사법부 독립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며 정치로부터의 독립이다. 판사들이 자신의 정치적 신조를 집단으로 관철하려는 것은 놀라운 정치 오염이다. 최근 일부 판사들이 잇달아 제기하는 위헌제청이라는 것도 사법 독립의 경계선을 허물고 있다. 위헌 제청은 입법부가 만든 법률에 대한 거부요 추상적인 헌법 정신을 방패삼아 스스로 입법자가 되려는 권력 추종일 수도 있다. 국회의원들이 제멋대로 방망이를 두드려 대는 것도 걱정거리인데 판사들까지 가세해서 해석권을 남용하기로 든다면 법은 정치의 위장막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법의 방종을 스스로 통제하는 사법 행정권은 그 존재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신영철 당시 법원장이,대중의 여론에 함몰되어 촛불재판을 기피하려는 법관들을 통제하려고 시도한 것은 그 방법의 적절성을 논외로 한다면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촛불 시위를 옹호하며 물러난 판사 케이스도 그런 경우다. 실체적 진실을 추구해야 할 판사가 허위 과장으로 오염된 TV 영상에서 위조된 기호조차 구분할 수 없는 정도의 지성이었다는 것이 오히려 놀랄 일이다. 사실과 시뮬라시옹을 구분 못하는 지성의 실종이라는 단어 외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가 검정색 법복과 높은 좌대에 긴 등받이가 달린 권위주의적 좌석 배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날카로운 법적 이성을 보고자 하는 때문이지 판사 개인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판사가 입정하면 모든 당사자가 일어서서 그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사법부는 판사 개인의 이념과 사상의 유혹으로부터 자기 절제의 기반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보편적 정의로 나아갈 의지가 있는 것인가.

정규재 < 논설위원 경제교육연구소장 jhj@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