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극선생님, 주식투자란 무엇입니까?"
"주식투자는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글 같은 주식시장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우직함과 단순함이 그 해답입니다"

1984년 주식에 입문한 뒤 25년이란 세월동안 온갖 풍파를 다 겪어온 '무극선생' 이승조(50·사진)씨. 재야고수 36명과 함께 세운 새빛인베스트먼트 리서치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승조씨는 일반투자자들과 이런 선문답을 주고받곤 한다.

무극(無極). 혹자는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상상을 하며 천장이 뚫린 '무극'을 떠올리지만 이씨는 "'무극'이란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을 뜻한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 절정에 달했던 '무극선생' 이승조씨의 인기는 지금도 식지 않았다. 두 번의 치명적인 실패와 성공투자를 통해 현재의 안정적인 삶을 찾기까지 체험을 통해 터득한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주식에 갓 입문한 가정주부부터 증권업계에 진출하려는 햇병아리 경제학도에 이르기까지 무극선생으로부터 답을 얻으려는 노력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둥지를 튼 새빛인베스트먼트 빌딩 5층 리서치센터에서 만난 이승조씨는 '정말 주식투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시장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을 벌이는 지난한 투쟁"이라고 잘라 말했다. 몸의 힘을 빼고 미래의 경제흐름을 읽어내는 힘을 길렀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는 험난한 길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이승조씨는 단 한 번의 주식투자로 500%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50억원을 쓸어 담은 원조 '슈퍼개미'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50억원을 손에 쥔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가정은 파탄났고 형제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같은 길을 걸었던 친구 두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채업자들의 괴롭힘을 피해 떠돌이 신세를 전전해야 했다.

주식투자로 인해 인생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삶 자체였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방법을 배웠고 결국 기사회생했다. 그것이 무극선생이 가진 힘이자 가치다.

무극선생은 현재 직접투자는 하지 않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주식은 시간여행…"몸의 힘을 빼고 긴 호흡을 가져라"

"단언컨대 테마주는 속성 상 생명력이 6개월 안팎에 불과합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승조씨는 정책주로 포장된 테마주의 속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테마주가 활개를 치고 있지만 그 생명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1992년 최악의 실패를 경험할 당시에도 테마주는 있었습니다. 당시는 정력과 미백 관련 바이오주와 유가 폭등에 따른 에너지절감 관련 종목들이 테마를 형성했고 부광약품이나 선도전기가 대장주였습니다. 하지만 테마주 생명은 6개월을 가지 않았고 결국 개인투자자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규모 투자자금과 정보력을 가진 기관투자자들이 미리 선점한 테마주 광풍에 휩싸일 경우 개인투자자들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최근 개인투자자들이 15% 이상의 변동성을 보이는 테마주에 맛을 들여 1∼2%의 착실한 수익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겁니다. 카지노 각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변동성을 보이면서도 수익률이 상승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오른만큼 내려오는 이론입니다. 테마주는 결국 이런 양상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는 앞으로의 경제 트렌드가 뭐가 될 것인가를 연구해 보고, 관련종목을 샀으면 당분간 주식시장을 떠나 있을 것을 권고했다. 심지어 증권사 객장 전광판은 3개월에 한번씩만 쳐다보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2008년 10월 주가 폭락기 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손절매해야 하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정확히 연구하고 매수했으면 연말까지만 지켜보자고 했어요. 10명 중 8명은 이를 참지못하고 가지고 있던 주식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공포를 샀던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이 급격히 회복되면서 엄청난 수익을 챙길수 있었습니다"

이씨는 몸의 힘을 빼고 '시간여행'을 즐길 것을 거듭 강조했다.

"주식 전문가라는 저도 적중확률은 50%밖에 안됩니다. 지수를 맞추려고 노력도 해봤고 절대적인 투자기법을 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해답은 그 어느곳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식은 '시간여행'입니다. 단기매매 보다는 파산하지 않을 알짜 우량주에 투자해 최소 3년은 기다리는 전략이 성패를 좌우합니다"

이 때부터 이씨는 작심했다.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해 투자의 역사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공황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주식매매를 했을까'가 화두였다. 1930년대 공매도로 희대의 자산가 반열에 올랐던 레시 리버모아가 왜 투자의 귀재에서 투기꾼으로 전략했나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10년간 투자 트렌드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 미래의 직관을 키우면서 현재는 나쁘지만 미래에 과실을 얻을 수있는 종목을 연구해 나갔다. 공부를 계속하며 호구지책으로 잡다한 일을 다 해봤지만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1995년에 실패에 관대한 외국계증권사 동방페레그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법인영업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외국계 증권사라 성과급제도가 활성화돼 있어 펀드매니저들의 구두까지 닦아주며 실적을 높였습니다. 성과급으로 빚도 조금씩 갚아나가 일부는 종자돈으로 챙겼지요"

하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이라는 직격탄과 함께 파생상품으로 큰 손실을 입은 동방페레그린이 도산하면서 또 한번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대우증권에 남아 있던 직원들의 도움으로 영업을 뛰면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죠"

그러던 이씨는 어려운 시절 밤잠을 설치며 공부를 통해 쌓은 노하우를 풀어낼 기회를 잡고 기사회생하게 된다.

"2000년까지 증시가 큰 변동성을 보이면서도 상승세를 탔습니다. 당시 주식투자자들에게 종목정보 등을 전화를 통해 제공하는 자동응답시스템(ARS)이 생기기 시작했고 여기에 뛰어들어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ARS를 통해 한 달에 최대 5억원까지도 벌었다는 이씨는 이를 기반으로 일어설 수 있었고 현재의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무극선생'이라는 필명도 그때부터 사용한 것이다.

빚을 갚고 김대중 정부 초기 IT(정보기술)업종이 한창 잘 나갈때 최대의 수익을 올린 이승조씨는 그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온갖 풍파를 겪으며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릎에서 사서 꼭지에서는 파는 전략을 고수해 현재는 수십억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실패 뒤 체득하게 된 우직함과 단순함이라는 철학 때문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1인 지식기업 100개 만드는 게 목표"

이승조씨는 최근 연예인 매니지먼트와 비슷한 주식시장을 주름잡을 능력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일에도 열중하고 있다. 똑똑한 제자를 키워 제도권 증권사에 투입하는 일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진정한 금융 싸움꾼을 키우려고 합니다. 제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경험한 노하우를 그대로 전수해 줘서 국내외 금융업계 어디서든 살아남을 자질을 갖춘 '지적 금융전사' 100명을 키울 생각입니다. '1인 지식기업'을 만드는 셈이지요."

인천국제공항 인근에 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도 서 있다. 정글같은 주식시장에서 지친 금융전사들의 쉼터이자 세계로 뻗어나가는 전초기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현재도 독신인 이씨는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루 15시간을 일하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한 달에 50권의 양서들을 독파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각종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TV의 출연 요청에 쉴 틈이 없다.

"주식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단순함과 우직함, 이 철학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으로 보답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무극선생은 모두에 꺼낸 말을 다시 되뇌였다.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었던 그의 말은 진정한 고수가 투자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글=한경닷컴 변관열·오정민 기자 / 사진=김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