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출생일은 1789년이다. 프랑스 혁명 수비대가 스스로를 '민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시초다. "넌 누구냐?" "난 민족의 편이다"는 말은 혁명 수비대가 주고받던 암(暗)구호였다. 출생부터가 권력에의 의지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민족주의는 민주주의가 들어서고야 비로소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민주적 질서와 자기정체성이 아니고는 민족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 실체도 없다. 황제가,왕들이,제후들이 다스리는 땅에는 계급들 간의 냉엄한 위계질서만 있을 뿐 민족이 자리잡을 공간이 없다.

민족이 수천년을 지속해 온 어떤 동일적 실체라는 관념은 근대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민족 고대성의 신화다. 근대성의 상징인 민주주의가 고대적 전설로서의 민족을 부각시킨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것은 일제 식민주의가 그 반작용으로 한국 민족주의를 형성했던 것만큼이나 역설적이다. 민족은 그렇게 근대에 들어서야 때늦게 출생신고를 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아니라 중화 올림픽으로 변질되고 있다. 월드컵이 둥근 공을 차고 내달리는 젊은 축구의 제전이 아니라 민족들 간의 핏대를 세우는 국가 대항전이 되고 만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평화의 원심력이 아니라 그것의 반대편으로 응집되는 구심력이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과 개막식 행사가 중화의 세계를 과시한 것은 중국 민족주의와 그것의 연장인 패권주의로 오해될 만하다. 그렇게 올림픽은 달아오르고 있다. 민족 독립을 추구하는 신장위구르의 사제 폭탄이 폭죽처럼 어지러이 하늘을 날아오르고 그루지야에서는 로켓포가 포물선을 그리는 가운데 세계인들은 모두가 자민족의 전사들에게만 관심을 온통 집중시키고 있다. 한국의 TV에서도 세계 선수들의 활약은 실종 상태다. 오로지 한국 선수들의 활약만 비출 뿐이다. 세계 각 지역에서 달려온 영웅들의 축제라는 평화의 메시지는 그렇게 사라진 지 오래다.

오로지 민족과 민족국가들의 대항전이며 바로 이런 도약대를 타고 중화 민족주의가 그 정당성을 얻고자 염원하고 있다. 무서운 일이다. 중화(中華)족의 첫 통일국가라고 할 만한 한(漢)이 성립되면서 사방의 민족들이 모조리 동이(東夷),서융(西戎),북적(北狄),남만(南蠻)의 야만으로 격하되었듯이 지금 중화주의가 날개를 얻는 상황에서 아시아의 평화가 어떤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서둘러 근대화에 눈을 뜨고 아시아의 첫 근대 민족국가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었던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민족은 내부로 응축된 힘이며 민족 아닌 자에 대한 적대감을 포함하며 그 자체로 패권적이다. 축제가 열리는 베이징 장안대로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 있는 위압적인 건물들로 채워지고 있다. 아름답고 편안하며 인간적인 얼굴을 한 건물이 아니라 압도하는 힘을 보여주는 제국적 건축물들이다.

문제는 경쟁하는 민족주의가 서로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턱없이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나 중국이 이어도까지 문제 삼으며 대국적 열망을 추구한다면 동북아의 골목길은 어떻게 되나. 한때 아시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공자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삼스럽게도 중국식 천하관을 피력하는 베이징 올림픽 식전행사를 보는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일모레 15일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다. 대륙 아닌 해양을 선택했기에 이만큼 열린 개방사회로 올라설 수 있었던 한국의 국가 정향(定向)을 재확인할 때다. 민족주의를 넘어서는,그래서 해양으로 열린 개방사회적 가치가 아니라면 동북아의 좁은 골목길에서 평화를 찾을 수는 없다. 골목길 이웃들의 거친 숨소리가 더욱 답답하게 다가오는 8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