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승패를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라고 했던가.

패배는 큰 상처를 만든다.

치열했던 승부의 열기는 한줌의 재로 사라지지만 패배의 아픔은 칠흑의 미로처럼 깊고 어둡다.

패자를 위로하는 어떤 헌사도 고개 숙이는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한다.

프로 바둑 기사는 패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지난 10여년간 부동의 세계 1위를 달렸던 이창호 9단의 전성기 승률도 70%대에 불과했다.

세 판을 둬 두 판을 이기면 일류 기사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 프로의 세계다.

해맑은 미소를 가진 청년 박영훈 9단(22)을 만났다.

지난 9일 후지쓰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직후였다.

결승에서 만난 이창호 9단을 한집반 차이로 따돌린 것.

"판세가 일찌감치 박 9단쪽으로 기울었다고 하던데,이 9단의 종반 추격이 매서웠던 모양이지요"라고 말을 건넸더니 "해설하는 분들이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판세는 시종일관 팽팽했으며 종반에 이 9단의 미세한 실수 때문에 승패가 갈렸다는 것이다.

관전평과 대국심리는 다르다고 하더니….승부라는 중압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사람과 제3자의 간격은 결코 메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바둑을 두느냐고 물었다.

입술만 실룩일 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긴 당대의 내로라 하는 최고수들도 바둑에 대한 정의가 저마다 다른 판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고수 사카다 에이오는 "바둑은 슬픈 드라마"라고 했고 국내 잡초바둑의 대명사 서봉수는 "바둑은 나무 위에 돌을 놓는 것"이라고 싱겁게 말했다.

1980년대 이후 일본 바둑계를 풍미한 조치훈 같은 이는 "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을 남겼다.

한참을 생각한 박 9단은 "(바둑의 세계는) 무한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끝없이 새로운 수들이 나온다고 했다.

"새로움은 즐거움을 줘요.

미지의 길을 걷는 설렘 같은 것 말이에요."

다시 "그래도 패배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박 9단은 "모험의 대가"라고 짧게 말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데 따른 결과인 만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래도 2003년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조치훈 9단에게 패한 일은 너무도 뼈아팠다.

실수를 해서 무너졌다는 자책감에 돌아서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박 9단이 국내 랭킹 1위 기사는 아니다.

국내 타이틀도 '기성' 하나만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를 인터뷰한 이유는 향후 10년을 겨냥한 잠재력이 어느 기사보다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박영훈은 14세에 프로에 입문,2년 만인 16세에 첫 타이틀(천원)을 따냈다.

2004년엔 생애 처음으로 국제대회인 후지쓰배에서 우승,최연소 9단 승단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듬해에는 역시 세계대회인 중환배를 우승하고 국내 기전인 기성과 신인왕전,물가정보배와 영남일보배에서 잇달아 우승컵을 들었다.

올해 전적은 35승12패로 국제대회 성적은 9승2패를 기록 중이다.

바둑계에선 그를 '소신산(小神算)'이라고 부른다.

신산(神算)은 귀신 같은 계산력을 갖고 있다는 이창호의 별명.

모든 바둑팬이 궁금해할 만한 것을 물었다.

종국까지 몇 수를 남겨놓으면 반집짜리까지 완벽하게 계산할 수 있느냐고.잠시 생각하던 그는 "50수 언저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100수를 남겨놓은 상태에선 어떠냐"고 했더니 "대형 전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한집 정도의 오차로 계산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기자가 다시 물었다.

"그런 정도라면 바둑의 모든 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정복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박 9단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든 수를 완벽하게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완벽한 수를 짧은 시간 내에 찾기도 어려워요."

박영훈은 모처럼 말을 길게 이어갔다.

천진난만한 청년은 어느새 전장을 호령하는 장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수가 되려면 우선 상상력이 뛰어나야 해요.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상상력 말이에요.

여기에 깊은 수읽기가 동반된 창의적인 국면 운영을 할줄 알아야 해요.

그래서 전문기사들은 '판을 짠다'는 표현을 써요."

실제 조치훈 같은 기사는 서너 수의 착점을 한 상태에서도 10시간씩 장고를 한다.

마음 속으로 수없이 많은 판을 만들었다가 쓸어버리곤 한다는 것.

박영훈은 '바둑사관학교'로 불리는 충암고를 나왔다.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친구도 대부분 프로 기사들이다.

"스스로 '바둑기계'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봤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정보기술(IT)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컴퓨터가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끈기와 집중력,희생을 감수하는 전략과 전술…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정신의 영역이거든요."

박영훈은 체력과 정신력이 허락하는 한 계속 바둑에 정진할 것이라고 했다.

승부는 숙명처럼 가슴을 짓누르지만 좋은 기보를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전체 판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의 흐름과 그 속에 번득이는 감각,그리고 심오한 상상력의 지평을 사람들에게 선사하고 싶단다.

그래서 바둑은 무수히 많은 사람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대화'라고 말했다.

박영훈도 결국 바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을 한 셈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빈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길은 먼 피안(彼岸)으로 향하는 듯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 박영훈은 … >

1985년 4월생

1997년 전국 아마추어 10강전 우승(11세,아마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

1999년 프로 입단

2001년 천원 우승(최저단 타이틀 획득 타이기록 작성)

2004년 제17회 후지쯔배 우승-최연소 최단기간 9단 승단(19년3개월)

2005년 제1회 중환배 우승

제16기 기성전 우승(현재 3연패)

2007년 제20회 후지쯔배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