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규 < KAIST 경영대학학장>

서울 동대문구 홍릉에 자리 잡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 경영전문대학원(MBA)은 국내 MBA의 '맏형'이다. MBA의 개념조차 생소하던 1996년에 출범해 '토종 MBA' 시장을 일궈왔다.10주년인 작년에는 특화 코스인 금융MBA,정보미디어MBA를 더해 경영대학으로 확장 개편됐다. 2003년 아시아 최초로 미국의 MBA '품질보증서'인 AACSB를 받았다. 2004년엔 아시아태평양 경영대학협의회(AAPBS)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큰형으로서 할 만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난 11일 오후 경영대학장실에서 만난 이재규 학장(경영대학원장 겸임)은 표정이 밝지 않아 보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 학장은 "11살이나 먹은 만큼 이제 명실상부한 글로벌 MBA로 도약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지만 여러 여건이 성에 차지 않아 걱정이 많다"면서 "그래서 더 자주 기도한다"고 말했다.

-취임 전에 싱가포르 경영대학 부학장으로 재직하셨습니다. 싱가포르는 국책차원에서 동남아 교육 허브를 추진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한국은 대학 개혁을 놓고 중구난방이죠. 싱가포르의 교훈은 뭘까요?

"싱가포르는 '정부가 대학 행정에 너무 개입한 결과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을 못 만들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일절 행정에 개입하지 않고 성과에 따라 지원하는 싱가포르 경영대학을 만든 거죠. 이 모델에 힘입어 싱가포르 경영대학은 단기간에 경영학 1위 대학으로 올라섰어요. 나머지 국립대도 이 모델로 개혁 중이죠."

-정부 지원이 절실하신 모양입니다.

"경영학 내지는 MBA 육성에 공적자금을 투입한다는 데 부정적인 인식이 적지 않습니다. KAIST 내부조차 그래요.

이제는 학문간의 융합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이공대생들도 경영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해요. 기업도 이를 원하죠.

무엇보다 경영학에 대한 인식을 바꿀 시점입니다.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인 시대에요. 기업의 부가가치 창출에 기여하는 경영지식은 공익적 지식인 셈이죠. 따라서 국가정책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싱가포르의 정부 지원규모는 어느 정도 입니까?

"학생 등록금의 3분의 2가 정부 지원금입니다."

-KAIST가 국내에서 MBA를 제일 먼저 시작한 배경이 뭔지 궁금합니다.

"KAIST 문화에서 찾아야죠. KAIST는 원래 석·박사 과정으로 출발한 학교예요. 다른 석·박사도 성공했는데 경영전문 석사 과정인 MBA가 안 될리 없다고 본 거죠. 또 KAIST 학생들의 경영학에 대한 갈증도 작용했고요. 모든 졸업생이 박사,교수되는 것은 아니니깐요. 기업으로도 많이 진출합니다. 학생들의 커리어를 이공계만으로 제한하고 싶지 않았죠. 크게 보면 '이공계 살리기 내지 매력 더하기' 전략입니다."

-KAIST의 현재 평가와 미래 비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지금은 국내 학생들을 글로벌 인재로 키워 한국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1단계죠. 2단계는 외국인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몰려 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100% 영어 강의를 해야 하고 장학금도 획기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현재의 정부 지원으론 어림없죠. 마지막 3단계는 완전히 독립적인 경영대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의 인시아드(INSEAD)를 목표로 합니다. 인시아드 경영대학은 프랑스에 있지만 멀리 인도의 학생들이 쇄도할 정도로 세계화됐습니다."

-1단계 성과는 어느 정도입니까?

"국내 대기업들이 해외 웬만한 MBA보다 KAIST MBA 출신을 더 찾습니다. 졸업 후 연봉 인상률이 53% 수준이죠. 첫 직장에서 3000여만원 받던 사람이 우리 MBA 2년을 거치면 대략 6000만원 선을 넘깁니다."

-지난해 교육인적자원부가 MBA 6개를 승인했습니다. 경쟁자들이 많아졌는데요.

"경쟁은 환영할 일이죠. 하지만 자칫 잘못 하면 주객이 전도될 수 있어요. MBA는 기업이 원해서 인재들을 대학에 보내줘야 하는데… 한꺼번에 MBA가 양산되면 대학이 기업에 입학생을 간청하게 되고… 결국,기업에 부담이 되고… 그래서 국내 MBA 전체 이미지가 나빠질까 걱정이기도 합니다."

-KAIST MBA의 차별점이 뭔가요?

"미국 노스웨스턴 로스쿨과 손잡고 비즈니스 법률전문가(LLM) 코스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 교수들이 와서 강의하죠. 우리 MBA 학생들은 미국 로스쿨 학위를 딸 수도 있어요. 기업 활동이 글로벌화될수록 각종 거래와 관련,나라 안팎의 법률 수요가 급증합니다. 이젠 MBA에 법률지식까지 갖춰야 하는 시대죠."

-흔히 한국형 MBA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맏형으로서 어떻게 보시는지?

"당연한 얘기입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의 경영 수준이 나라 밖에서도 벤치마킹 할 정도가돼야 우리 경영학도 세계적 수준이 될 수 있어요. '일본형 경영학'은 도요타의 '저스트 인 타임'(자동차부품을 재고 없이 실시간에 생산라인에 투입하는 방식)에서 출발했다고 봐야 합니다. 한국 기업에서 이런 성공스토리들이 많이 나와야 MBA도 한국형을 추구할 수 있죠. 그래야 나라 밖에서도 알아줍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좀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며칠 전 빌 게이츠가 30년 만에 하버드 졸업장을 받으면서 '장차 기업의 창의력과 첨단기술로 빈부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연설을 해서 감동과 충격을 줬어요. 다국적 기업의 파워가 국경을 없애버리는 상황에서 빌 게이츠 같은 세계적인 기업인들은 이제 시장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시장 주변 상황까지 선순환시키는 문제도 경영의 일환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경영학 내지 MBA는 한국적 경영과제인 노사문제,지배구조 문제 등도 연구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경영학은 원래 종합적이고 시대적인 학문입니다. 경영학의 지평을 시대상황에 맞게 개편해야 한다는 데 공감합니다. 경영학도로서 개인적인 관심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야를 경영학에서 다루기엔 아직 시장의 수요,즉 기업의 수요가 뒷받침 하지 못하고 있죠. 앞으로 많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 학생들에게 세상에 유익한 가치창조,봉사하는 리더십 등에 대한 특강 등을 가급적 많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담=이동우 부국장/정리=성선화 기자 lee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