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李箱.1910.9∼1937.4))이 살던 집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 병석의 이상이, 안방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와 의사의 웃음소리로 인해 분노했었던 그 집이다. 보성고보 동창인 문종혁과 현대미술에 대해 논했으며, 백부와의 심리적 드라마로 점철된 장편소설 '12월12일'의 근원을 이룬 바로 그 집이다. 합판으로 만든 천장이 대들보를 가렸다. 기둥들은 반들거렸으며, 안방과 쪽마루 대청이 있던 곳에는 1975년부터 살아온 집주인의 서예작품들과 벼루 붓 책장이 낯선 손님을 맞는다. 물론 그 어디에도 이상의 자취는 없었다. 하지만 책장안에는 빛 바랜 김소월 시집이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도 언듯 눈에 띄었던 듯하다. '이상 기념관'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이리라. 문득 10여년 전에 들렀던 일본 니가타(新潟)현 유자와(湯澤)의 한 여관이 생각났다. 가와바타가 머물며 작품을 썼다는 여관방은 작은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나는 '설국' 작가의 커다란 사진과 펼쳐진 책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주인 할머니가 타준 커피를 한모금 마시니, 이상이 그리워했던 '향기로운 MJB의 미각'이 느껴지는 듯했다. 브라질에서는 석탄 대신 커피로 기차가 달린다고 한 이상의 유머도 떠올랐다. '치사스런' 도시 도쿄(東京)에서 최후의 20전을 던져 타임스판 상용영어 4천자라는 서적을 샀던 이상의 배고픈 유머, 달 밝은 밤 변소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볼일을 보며 시상에 잠기곤 했다는 그 옛 마당 넘어, 새로 생긴 호돌이 책대여점의 유리문을 열고 중학생들이 들어왔다. 골목에 남은 눈으로 눈싸움을 했는지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했다. 아마도 아이들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피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며칠 전 꽤 많은 눈이 내렸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지역도 있었다. 그리고 추위가 왔다. '가구(街衢:길거리)의 추위'라는 이상의 시 제목처럼,아직도 '가로에서는 차디찬 공기가 자웅이주(雌雄異株)의 생물을 학대하고 있다' 아니, 학대는 커녕 오랜만에 맞은 서울의 추위는 오히려 상쾌했다. 식민지시대의 그 누군가가 쓴 듯한 책을 제자리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오자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엄한(嚴寒)'이 시작됐다. 물론 오래된 한옥 내부도 춥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따뜻한 공기는 실내에 있다'고 한 이상의 말과는 달리, 나는 그 집의 '외풍' 밑에서 내 어린시절과 만났다. 내 반짝이는 썰매터를 만들어 준 그때의 추위는 지극히 투명했으며, 벙어리 장갑을 낀 내 모습은 조그맣고 선명했다. 털실로 스웨터와 목도리를 떠주었던 나의 어머니는 부드럽고 냉정했다. 주인 할머니는 하나 남은 건넌방에서 살고 있었다. 건넌방만 남은 집-, 하지만 할머니에게 그러했듯이, 이상에게도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건넌방이야말로 이상의 본거지였을지 모른다. 나는 그 방을 마주보며 무릎 꿇고 앉았다. 할머니는 단정한 자세로 차가운 돗자리 위에 담요를 깔아주었다. 편히 앉으라고 했지만, 나는 되도록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돗자리와 담요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러자 난 데 없이 - 아마 추위 때문이었으리라 - 이상을 논한 최재서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이상의 '실험적인 테크닉'과 '기괴한 인물'이 단순한 지적 유희이거나 불순한 인기책(策)이 아니었음에 안심했다. 최재서는, 이상의 작품이 고도로 발달된 지적 생활에서 솟아나는 필지(必至)의 소산이자 표현 형식에 대한 목숨을 건 탐구와 노력의 결과라고 인정했다. 사실 그렇다. 요컨대 이상만큼 정직하게 추웠던 경우는 드물다. 김기림의 말을 빌면,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썼다. '생명의 북극(北極)'에서 '겨울과 더불어 운명을 회피'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닫힌 문 앞에 탄생'한 그에게 '동사(凍死)는 폭풍처럼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은 여전히 '그의 문간 앞에서 외출(外出)을 떨고'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추위를 명징(明澄)하게 깨달음으로써 스스로 따뜻해지려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몫이다. 삼복 더위의 여름에조차 말이다. < lkhors@yonsei.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