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고등학교 때 보이 스카우트 활동을 했다. 매년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같은 단원들과 함께 고아원으로 봉사활동을 갔었던 그 때의 기억이 새롭다.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성탄절 노래도 부르고 준비해 간 케이크도 먹고 게임도 하다보면 곧 헤어질 시간이 된다. 고아원 정문 밖으로 나가는 우리를 보며 잘 가라는 인사가 아닌 언제 다시 올 것이냐는 원생들의 물음에 그들이 앉고 있는 마음 속 외로움을 실감했던 오래 전의 일이 생각나는 연말이다.




사회인이 된 후로는 해외에 나가 오래 생활을 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늘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봉사활동 한 번 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은 있지만 실천하지 못 하는 게으름과 핑계를 일소하기 위해 2006년에는 매달 서울의 모 고아원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했다. 그런데 20년 전 고등학교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아이들은 인사가 아닌 질문으로 나의 방문을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또 언제 오실 거예요.” 정에 굶주린 그들은 떠나는 나를 보고 잘 가라는 인사대신 다시 만날 날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도 아니고 입을 것도 아닌,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임이 절실히 느껴져 고아원을 떠나는 발걸음이 늘 무거웠다.




어떤 사회든 소외된 계층이 있기 마련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대변되는 사회 복지 선진국인 북유럽 국가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소외된 계층은 있다. 다만 그들을 바라다보는 사회의 인식과 관심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연말에만 반짝하고 마는 우리의 그 것과는 달리 늘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이 있다는 것이 작아 보이지만 큰 차이일 것이다. 인종과 국적과는 상관없이 한 사회가 포용하고 있는 모든 자들에 대한 관용의 정도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도 급격한 산업화와 글로벌화가 진행되다보니 소외라는 말이 우리가 늘 강조해왔던 단일 민족 내에서의 소외가 아닌 글로벌화 된 소외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백만 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외국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경우도 수만 건에 달한다. 이렇다 보니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역적으로 다르겠지만 경기도의 어떤 지역에 가면 외국인 반, 한국인 반이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외국인과 결혼하여 태어난 혼혈인, 아니 공공연히 ‘코시안’ 이라고 불리는 다문화가정아. 우리 사회의 ‘소외 지도’ 가 단순이 많이 갖고 덜 갖고의 차원을 넘어 어디서 온 사람이고, 국적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게 그려지는 현상을 우리는 이미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코시안이라는 말 자체도 다분히 지역적이고 인종적인 편견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생각해볼 때, 우리 사회의 편견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엄연히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야할 그들이 ‘다문화가정아’ 라는 말로 표현되는 우리의 현실이 소외 아닌 소외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다가오는 2009년부터는 글로벌 시대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얄팍한 순혈 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적어도 국적에 의한 소외,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에서 발생되는 소외현상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피부색과 외모에 때문에 발생하는 그들의 정서적 고통도 함께 사라졌으면 좋겠다. 미국 44대 대통령으로 당당하게 당선된 버락 오바마처럼 사회적 편견이라는 인생의 장애물을 뛰어 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고 또 그런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전 세계 200여개국가 중 한국회사와 한국인이 진출하지 않은 나라를 세는 것이 훨씬 빠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고, 수백 만 명의 해외교포가 현지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속에 새겨 넣어야 한다.


(서울 신문 12월 15일자에 게재된 본인의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