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국 칼럼] 첫 번째 괴로움
글쓰기에 관심이 많고, 글감을 찾아야하는 입장에서 가끔은 기분이 좋고 입가의 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는 경우는, 좋은 문장을 찾았거나 읽을 경우이다. 그러면 보통은 그 문장전문을 기록해 놓거나 인용해 글을 만들기도 한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에서 건진 글이다. “요즈음 밤낮으로 바라는 일이라곤 오직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한번 받아보는 것이랍니다. 그러나 막상 편지를 받으면, 마치 국문을 받는 중형의 죄수가 관원의 판결문을 듣기 바로 직전에 가슴이 먼저 쿵쾅쿵쾅 두근거려 거의 진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답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제 얼굴빛이 붉어졌다 창백해졌다 자주 변한다고 합니다. 겨우 편지를 다 읽고 나서야, 늙으신 어머님이 예전과 마찬가지이고, 처자식도 근근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지요. 그러면 내일도 이러한 편지를 보기를 다시 기대하게 된답니다. 이것은 마치 소갈증에 걸린 사람이 냉수 한 사발을 마시자마자 또 다시 냉수 한 사발을 마시고 싶은 것 같아,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이 나서 도무지 목마르지 않은 때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괴로움입니다”(『눈썹을 펴지 못하고 떠난 당신에게』인용)

위 글은 이학규(1770-1835)의 글이다. 그는 유배기간이 무려 24년이나 되었다. 유배지에서 유일한 낙이 아마도 집에서 보내준 편지가 아닐까? 그가 처한 환경에서 기다림이 첫 번째 괴로움이라는 말이 충분히 실감이 난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힘든 것중 하나도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 날은 디지털시대요, 초스피드 시대이다. 전처럼 손으로 편지를 써서 우체국에서 우표를 붙이고 보내는 경우가 정말 드물다. 손안에 컴퓨터를 각자하나씩 가지고 있다. 이메일로 보내도 스마트폰으로 확인을 하고 즉답을 보내기도 한다. 보통은 단문인 글이나. 장문이라도 카톡으로 소통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은 ‘편지를 기다린다, 소식을 기다린다.’라는 말이 점점 사라진다. 그러나 지금부터 수 십 년 전만 해도 편지에 담긴 사연을 기다리는 시절이 있었다. 필자는 군복무시절 경험을 하였다. 지금이야 군 입영을 해도 일과 후 전화까지 할 수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러나 전에는 그렇지가 못했다. 군대 초년병시절 고생스럽고 힘든 시기 외부에서 보내준 편지가 큰 위안이 되고, 군대시절 고달픔을 이겨나가는 작은 힘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듯,때로는 기다림이 그립다.

최근에 군대에 있을시 기록했던 노트를 보았다. 어느 지인에게 보냈던 장문의 편지를 읽었다. 그러면서 군 생활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내무반에 들어와 편지봉투가 놓여 있으면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개봉해 읽었던 기억이 난다. 면회 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전화도 되지 않던 시절 유일한 창구는 편지이다. 기다림의 예는 많다.

기다림 후에 얻어지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면 그 기다림은 다시 기다려지는 법이다. 왜, 기다림 후의 즐거움과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이런 기다림의 연속이 있기에 살만한 것 아닌가? 이는 마치 연속극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어 시청하면서 즐거움과 유희를 경험하면 다음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좋은 드라마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기심을 갖게 만들고 기다려지게 하고 다시 보고픈 갈증을 만들게 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성도들의 기다림이다.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 앞으로 나와 예배를 드린다. 어쩌면 주일은 기다림이 크면 클수록 갈증이 크면 클수록 더 은혜롭고 행복할 수 있다. 요즘 코로나가 우리들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 만나는 것을 뜸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보고 싶은 얼굴을 만나게 되면 그 즐거움은 두 배이다. 마찬가지이다. 주일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기다리되 ‘눈에 진물 나도록 기다린다.’는 말처럼 그렇게 갈증을 느끼면서 기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학규의 첫 번째 괴로움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한경닷컴 The Lifeist> 고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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