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갈데없이, 정현종

갈데없이



정현종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 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뜻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빛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데없이 아름답습니다



[태헌의 한역(漢譯)]


不容置疑(불용치의)



人向大海爲風吹(인향대해위풍취)


人向寒地以雪飛(인향한지이설비)


人向暖處以日輝(인향난처이일휘)


人向咸池以霞緋(인향함지이하비)


模樣皆殊異(모양개수이)


不容置疑美(불용치의미)



[주석]


* 不容置疑(불용치의) : 의심할 여지가 없이, 갈데없이.


人向(인향) : 사람이 ~로 향하다, 사람이 ~로 가다. / 大海(대해) : 큰 바다, 바다. / 爲風吹(위풍취) : 바람이 되어 불다.


寒地(한지) : 추운 땅, 추운 데. / 以雪飛(이설비) : 눈으로 날리다.


暖處(난처) : 따뜻한 곳, 따뜻한 데. / 以日輝(이일휘) : 햇빛으로 빛나다.


咸池(함지) : 해가 질 때 그곳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전설상의 서쪽에 있는 큰 못. / 以霞緋(이하비) : 노을로 붉은 빛을 내다.


模樣(모양) : 모양. / 皆(개) : 다, 모두. / 殊異(수이) : (특별하게) 서로 다르다.


美(미) : 아름답다.



[직역]


갈데없이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람이 되어 불거나


사람이 추운 데로 가서


눈으로 날리거나


사람이 따뜻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빛나거나


사람이 해 지는 데로 가서


노을로 붉은 빛을 내면


모양은 다 달라도


갈데없이 아름답습니다



[漢譯 노트]


‘갈데없이’를 ‘갈 데 없이’로 파악하여 ‘오갈 데 없이’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갈데없이’가 ‘갈 데 없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사용하는 의미는 사뭇 다르다. ‘갈데없이’는 ‘오직 그렇게밖에는 달리 될 수 없게’라는 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역자는 이를 ‘不容置疑(불용치의)’라는 성어(成語)로 한역하였는데, 이를 풀이하면 대략 ‘의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시인이 이 시를 통하여 언급한 자연의 네 가지 현상, 곧 바람과 눈, 햇빛, 노을은 아름다운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통하여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아름다움을 현시(顯示)할 수 있다면 하는 일이 그 무엇이든 가치 있지 않을까?


일의 귀천과 관련하여 언급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일화로는 아래와 같은 아브라함 링컨의 에피소드를 들 수 있다. 링컨이 어느 날 백악관 복도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가던 비서관이 보고는, “대통령 각하께서 그런 일을 하시면 곤란합니다.”라며 그만두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링컨은, “이 세상에 비천한 일은 없소. 다만 비천한 사람이 있을 뿐이오.”라 하고는 계속하여 구두를 닦았다고 한다.


본인이 원했던 일인가 아닌가에는 상관없이 현재의 자기 일을 묵묵히 행하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그들의 일이 경우에 따라 남루하게 보일 수는 있어도 그들의 인생이 남루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 풍진세상(風塵世上)에서, 딱히 가진 것 없어도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밝은 미소를 그려보라! 그것이 바로 지선(至善)의 미소가 아니겠는가? 그들이 발 딛고 사는 그곳이 바로 낙원이 아니겠는가?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화려하게 산다는 것과 결코 동의어일 수가 없으며, 그 어떤 권력이나 재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역자는 믿는다.*


역자는 연 구분 없이 9행으로 구성된 원시를 6구로 이루어진 고시(古詩)로 한역하였는데, 마지막 2구는 오언구(五言句)로 처리하였다. 한역시는 매구(每句)마다 압운하였으며, 그 운자는 ‘吹(취)’·‘飛(비)’·‘輝(휘)’·‘緋(비)’·‘異(이)’·‘美(미)’이다.


※ ‘*’를 한 단락의 일부는 역자의 옛 한시집인 ≪減肥藥 처방전≫의 서문을 가져와 약간 고친 것임을 밝혀둔다.


2020. 1. 21.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