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6명, 전력 끊겨 어둠·유독가스에 선실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불이야!"
4일 새벽. 제주시 우도면 남동쪽 74㎞ 해상에서 서귀포선적 해양호(29t·승선원 8명)에 불이 붙었다.

'만선의 꿈' 갈치잡이어선, 눈 깜짝할 새 화마에
이날 오전 1시∼1시 30분 조업을 마치고 선수창고에서 혼자 잠을 자고 있던 갑판장 김모(47)씨는 호흡하기 힘들정도의 연기를 마시고 잠에서 깨어났다.

모든 전등이 끊겨 칠흑같이 어두웠던 탓에 갑판장은 손으로 앞을 더듬어 선수 창고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갑판장이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선미에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불길이 번져있던 상태였다.

특히 선미 아래쪽에 있는 기관실 양쪽 출입문에서 심한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갑판장은 차마 선미로는 진입하지 못하고 선체 가운데 위치한 조타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선장 김모(59)씨를 깨웠다.

이들은 곧바로 3.7㎞ 떨어진 해상에 있던 선단선 A호에 무전을 통해 구조를 요청했다.

당시 나머지 선원 6명은 화마가 치솟고 있던 기관실 바로 뒤에 위치한 선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상황이었다.

선장과 갑판장은 거센 화마에 오도 가도 못하고 선수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불길을 피했다.

'만선의 꿈' 갈치잡이어선, 눈 깜짝할 새 화마에
오전 3시 35분께. 저 멀리서 이들을 구하러 온 연승어선 B호가 보이자 선장과 갑판장은 방현재(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선박 주변에 두르는 완충 설비)와 닻을 잡고 바다에 뛰어내렸다.

해양호는 그 순간에도 걷잡을 새 없이 계속해서 불길에 타고 있었다.

선장과 갑판장을 구출한 B호는 해양호 주변을 계속해서 돌았지만 다른 선원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어 해경 506함이 오전 4시 38분께 사고 현장에 도착해 2시간가량 해양호에 연거푸 소화포를 이용해 물을 뿌렸지만,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불은 해양호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불은 기관실에서 시작해 걷잡을 새 없이 어선 전체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해양호 선체 재질은 화재에 취약한 섬유강화플라스틱(FRP) 소재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하 선실 바로 앞에 위치한 기관실에 순식간에 화마가 덮치면서 잠들어 있던 선원들은 신속하게 대피할 수 없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해양호 도면을 보면 지하 선실을 빠져나오려면 가로·세로 74㎝ 해치문(틈새없이 완전히 닫히는 선박용 출입문)을 열고 통로를 빠져나온 뒤 식당을 거쳐 선미에 위치한 입구로 나와야 한다.

잠들어 있던 선원들이 화재를 빠르게 인지해 이 같은 구조의 선실을 재빨리 탈출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목격자와 해경은 보고 있다.

'만선의 꿈' 갈치잡이어선, 눈 깜짝할 새 화마에
FRP가 불에 타면서 내뿜는 유독가스와 전원이 차단돼 앞을 보기 힘든 상태였던 것도 선원들의 탈출을 어렵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FRP 선박은 건조비가 비교적 저렴해 어선 건조에 많이 활용되지만, 외부 충격과 화재에 매우 취약한 단점이 있어 화재 피해 어선이 발생할때마다 주요 사고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해양호의 선박자동식별장치(AIS)는 이날 오전 2시 34분께 신호가 끊겼다.

이에 따라 해경은 AIS 신호가 끊긴 시간보다 앞서 해양호 기관실에서 화재가 발생해 조타실에 설치된 AIS 전원을 차단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양호는 지난 2일 오전 4시 28분께 서귀포시 성산항에서 출항해 갈치잡이에 나섰다.

해양호는 다음 달 1일 입항할 예정이었지만, 조업에 나선 지 이틀 만에 사고가 발생했다.

현재 구조된 선장과 갑판장 외에 나머지 한국인 선원 1명과 베트남 선원 5명 등 6명은 발견이 되지 않은 상태다.

선장은 머리와 팔에 화상을 입어 제주 시내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갑판장은 건강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dragon.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