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대형 부동산 운용사인 A사의 최고투자책임자(CIO)는 23일 서울 논현동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를 방문했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투자 건을 협의하기 위해 사전에 해외대체투자실과 약속을 하고 찾아갔는데도 당사자를 만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을 운용하는 기금운용본부 주식운용실도 이날 하루 종일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국내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급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수차례 전화했지만 국민연금 측 담당자 전화가 하루 종일 꺼져 있어 당황했다”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검찰이 이날 국민연금을 압수수색한 뒤 벌어진 ‘후폭풍’이다. 기금운용본부에 대한 검찰 압수수색은 1999년 기금운용본부 출범 후 처음이다.

이날 검찰은 지난해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기금운용본부가 찬성 결정을 할 당시 열린 내부 투자위원회 참석자들의 휴대폰과 PC 등을 모조리 수거해 갔다. 당시 회의 참석자들은 총 23명. 그중 17명이 현직에 있다.

당장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은 큰 차질을 빚고 있다. 다수의 취재진이 본부 건물에 진을 치고 검찰 수사관들의 면담 요청이 이어지면서 예정된 상담·회의 일정은 대부분 취소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주식운용실은 사실상 업무가 마비됐다. 주식 의결권 행사를 담당하는 실무 부서인 데다 지난해 투자위원회의 핵심 참석자들이 실·팀장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식운용실이 운용하는 국내 주식은 지난 6월 말 기준 95조5000억원. 이 중 50조원(52.4%)을 기금운용본부가 직접 운용하며 나머지 45조5000억원은 자산운용사 등에 위탁 운용한다.

이번 사태가 향후 국민연금의 주요 투자 결정에 나쁜 선례가 될 것으로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투자위원회 회의록이 외부에 통째로 공개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개별 투자안을 결정할 때 투자 타당성보다는 여론이나 정치적 상황을 더 고려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로 기금운용본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확산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부당하게 찬성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전국 각지의 콜센터와 지점들도 ‘항의 전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민연금 자산은 지난 8월 말 기준 543조원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크다.

좌동욱/유창재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