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범죄 성격 자체보다 '여성혐오' 상징적 표출에 주목해야"

서울 지하철 강남역 인근 상가 화장실에서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 이후 무고하게 희생된 피해자를 기리는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거세다.

피의자 김모(34)씨가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에게 항상 무시당했다"고 말한 것이 알려지자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추모의 벽'이 생겼고 추모 촛불 문화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동안 온라인에 만연한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계속됐지만 이같이 집단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시작된 추모 운동이 공감을 얻는 것은 여성들이 체감하는 '여성 혐오'와 두려움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20일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냐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범죄인의 동기에 대한 심리분석과 수사 등이 필요하다"면서도 "범죄 성격 자체를 규명하는 것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혐오범죄가 발생하면 흑인 사회가 이를 흑인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반발하는 것처럼 이번 사건을 두고 여성들이 '나는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혐오를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추모객들의 포스트잇을 보면 '살아남아 죄송합니다', '다음 타깃은 저겠죠, 여자니까요' 등 여성인 본인을 잠재적 피해자라고 여기는 내용이 다수 등장한다.

홍 교수는 "이는 이번 살인 사건 뿐 아니라 사소한 혐오 표현, 수위가 낮은 수준의 폭력에 대해 그동안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차별과 혐오에 대한 불안감이 응축돼 있다가 이 범죄로 인해 폭발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역시 추모 열기에 대해 "여성이 사회전반을 성차별적으로 느끼고 본다는 징후"라며 "최근 남녀 간 대립에서 폭력을 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불안을 통한 공감대가 형성됐고 이를 표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여성 혐오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만큼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헌법에도 저촉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을 방치해두면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자정 능력을 잃어간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계기"라고 지적했다.

인종, 난민 등에 적대와 혐오를 마구 표현하는 것을 시민들이 어떻게 막아내느냐는 각 사회의 건강성과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혐오에 대해 되짚어야 하는 이유다.

조한 교수는 "남녀 대립 구도로 이 문제를 푸는 것보다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혐오 자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며 "다원사회로 옮겨가는 지금이야말로 다양성 속 혐오 문제에 대해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홍성수 교수 역시 "이 사건을 강력범죄에 한정하게 되면 근본적 문제 해결 없이 결과만을 처벌하는 단편적인 방편이 될 것"이라며 "더 근본적인 문제, 왜 이런 혐오와 차별이 시작됐느냐에 대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채새롬 기자 srcha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