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두산가(家) 기업인'.4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두산을 대표하는 경영인이었지만,말년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1937년생인 박 전 회장은 고(故) 박두병 그룹 초대 회장의 차남이다. 경기고와 미국 뉴욕대를 졸업한 후 1965년 두산산업에 입사했다. 동양맥주,두산상사,두산건설 등의 대표이사를 거쳐 1996년 형제경영의 전통에 따라 큰형 박용곤 명예회장을 이어 그룹 회장에 올랐다. 이후 2005년까지 9년간 두산호(號)를 이끌었다. 외환위기 이후엔 소비재 사업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면서 그룹 체질을 중공업 위주로 바꾸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룹 회장 재임 시절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등도 역임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한 · 이집트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과 한 · 스페인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국제상공회의소 국내위원회 부회장 등도 지냈다.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석탑산업훈장,금탑산업훈장,한 · 스페인 민간공로훈장 기사장,벨기에 왕실훈장,한국능률협회 '2003년 한국의 경영자상' 등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 전 회장은 고희(古稀)를 전후로 잇달아 풍파를 맞았다. 2005년 7월 동생 박용성 회장을 그룹회장으로 추대하는 것에 고인이 반발하면서 촉발된 소위 '형제의 난' 이후부터다. 형제 간 갈등은 2006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두산가 경영인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일단락됐다.

박 전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근 3년 만인 작년 2월 재기에 나섰다. 중견 건설업체인 성지건설을 인수하면서 경영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성지건설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금융권에서 조달했지만,작년 말부터 시작된 금융위기와 건설경기 침체 등으로 심각한 자금 압박을 받게 됐다. 경찰은 이날 박 전 회장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A4용지 6장 분량의 유서를 자택 안방 금고에서 발견했다. 유서는 가족과 회사 임직원들에게 "회사의 부채가 너무 많아 경영이 어렵다. 채권 채무 관계를 잘 정리해 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며,두산가 형제들과 관련된 내용은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고인은 오래 전부터 누적된 스트레스로 심장병을 앓아 왔다"며 "형제들과의 갈등,아들의 구속 등에 이어 성지건설의 경영난까지 겹치면서 우울증이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 전 회장의 동생이자 두산그룹 이사회 의장인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은 이날 오후 중국에서 급거 귀국했다. 재계에서는 박 전 회장의 별세를 계기로 두산가 형제 간의 갈등이 봉합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장창민/박민제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