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IMF 그리고 미국 정부는 개발도상국들의 경제개발 사업을 지원하면서 일관성 있게 규제 철폐,자유화 그리고 민영화를 권고해 왔다. 워싱턴에 소재한 이들 기관들이 경제개발전략으로 내세우는 규제철폐-자유화-민영화의 처방을 경제학자 윌리엄슨은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라고 명명하였다. 보통 개도국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해 시장에 깊이 개입하는 개발정책을 추진하지만,'워싱턴 합의'는 기본적으로 정부 간섭을 줄이고 시장을 강화하도록 하는 개발정책을 권장한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보다는 시장에서 물러날 때 오히려 더 나은 개발 성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영리추구를 허용하는 시장은 인간의 이기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자극하여 근로유인을 유발한다. 시장을 잘만 활용하면 개도국 국민들로 하여금 더욱 더 열심히 일하도록 이끌어 경이적 경제성장을 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개입을 줄여서 시장을 시장답게 만들자는 '워싱턴 합의'는 결국 그렇게 하자는 처방이다. 그러나 이 처방에 따라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해 온 중남미국가들의 개발현실은 한결같이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이기적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자는 '워싱턴 합의'가 왜 현실에서는 경제개발에 실패하는 것일까?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부의 부당한 개입이 없어야 한다. 정부가 시장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권고하는 '워싱턴 합의'는 이 점을 지적한다. 선진국 정부는 재산권과 계약권을 잘 보호하면서 자유로운 시장거래를 허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만든다. 정부는 권리보호만 하면 되며 그 이외의 시장개입은 삼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개도국 정부는 재산권과 계약권의 보호에서 그 능력이 선진국 정부에 크게 못 미친다.

능력 부족으로 민간기업의 횡포를 단속하기 어려워지면 개도국 정부는 아예 공기업을 설립한다. 개도국의 지나치게 까다로운 규제는 대개 부족한 규제시행 능력에 대한 보완책이다. 시장이 부실하여 수요는 급증하는데 공급이 같이 늘지 못하면 개도국 정부는 가격 상한을 강요하기도 한다. 시장의 작동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규제와 제도 가운데 상당부분은 개도국 나름대로 재산권과 계약권을 보호하는 수단인 것이다.

개도국 정부가 '워싱턴 합의'의 권고에 따라서 시장에서 일방적으로 물러나버리면 재산권 침탈을 막기 어렵다. 그 결과 일해도 그 성과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게 되어버린 시장에서는 근로유인이 살아날 수가 없고 개발성과도 부진할 수밖에 없다. '워싱턴 합의'는 개도국 정부의 시장개입 철회가 한편으로는 시장왜곡을 시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권 보호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개도국 정부의 시장개입 철회가 개발성과를 거두려면 재산권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작업과 맞물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