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우주강국'의 꿈이 또다시 좌절됐다. 나로호 개발 사업이 시작된 때는 2002년 8월.7년여 만의 개발 기간 중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사연 또한 적지 않았다. 나로호의 목표는 100㎏급 인공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는 우주발사체 개발 및 발사.총 사업비로 5025억원이 들었다. 주요 연구내용은 위성 발사체 시스템 설계 및 제작 · 시험,터보펌프식 액체추진기관 및 고체 킥모터 개발,위성의 궤도 투입 기술 확보 및 발사 운용 등이었다.

한국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KSLV-Ⅰ)의 발사 부분 실패는 지난 7년간 '우리가 만든 위성을,우리의 로켓으로,우리 땅에서 발사한다'는 일념 하나로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한 채 역경의 시간을 보냈던 연구원들에게는 큰 아쉬움을 남겼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밤샘회의에 참가하느라 지치고,문제점을 찾기 위해 숱한 철야작업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고군분투했던 시간이 귀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로호의 정상궤도 진입 실패를 '절반의 성공'이라고 자위하며 내년의 완전 성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작정이다.

25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따르면 '상단부 엔진 고공환경 시험설비(HATF)' 구축팀의 일원이었던 김모 연구원은 2007년 5월 결혼식을 불과 이틀 앞두고 첫 번째 설비검증 시험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결혼식을 '중도 포기'할 뻔했다. 다행히 설비검증 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김 연구원은 결혼 전날에야 동료들과 전남 고흥에서 결혼식 장소인 대구로 향했고 가까스로 결혼 일정에 맞췄다. 하지만 신부를 맞이한 기쁨도 잠시.그는 이틀 뒤에 예정된 두 번째 설비검증 시험 때문에 신혼여행은 뒤로 미뤄야만 했다.

발사대 구축에 참여한 A씨는 2007년 3월 러시아로부터 발사대 설계문서를 받아든 뒤 발사대 구축에 매달린 탓에 병상에 누운 아내를 가까이서 돌볼 수가 없었다. A씨는 신장수술을 받고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한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만 남긴 채 다시 근무지로 돌아와야 했다.


나로호 발사까지는 위험천만한 순간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발사된 나로호 추적에 필요한 장비 검증을 위해 연구원들은 경비행기를 이용한 모의시험에 나섰지만 연구원들이 탄 비행기가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를 만나면서 비행장에 가까스로 착륙하기도 했다. 재차 감행한 모의 비행에서는 경비행기의 계기판이 모두 멎는 바람에 회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이들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나로호 개발 과정에서 8t의 추진력을 가진 킥모터(상단부 로켓)를 개발하면서 지상 연소시험 도중 큰 폭발사고를 겪기도 했다. 박정주 항우연 발사체계사업단장은 "당시 뒤쪽으로 화염을 분사해야 하는데 앞쪽에서 터져 시험시설이 모두 망가지고 타버렸다"며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는 데 상당히 고생했다"고 말했다.

발사체 기술 전파에 나선 러시아 전문가들과의 '소통문제'도 한동안 나로호 개발에 애로점으로 작용했다. 러시아 측은 나로호 개발 초기 한국 기술 수준을 낮게 평가해 대화에 쉽게 응하지 않았고 연구원들은 통역이 있어도 상호 의사전달이 어려워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물불 안가리고 매달리는 연구원들의 모습은 러시아 전문가들을 감동시켰고,이제는 실력 인정과 신뢰 구축을 넘어 해외 발사대 구축사업에 함께 참여하자는 반가운 제안을 받기도 했다.

나로호의 1단 액체연료추진 기관을 개발한 러시아 연구원들도 힘든 객지생활을 해왔다. 러시아 흐루니체프사가 파견한 과학자와 엔지니어,보안요원 약 160명이 국내에 머물고 있다. 이 중 50여명은 나로호의 발사를 책임진 관제요원들로,25일 발사일에도 발사체통제센터(LCC)에 머물며 발사 실무를 담당했다. 심지어 발사대 전문가 15명은 한국에서 2년 이상 살고 있다.

외나로도(고흥)=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