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내에 서울과 북한 개성간 육로관광길이 열리고 개성에 대규모 공단을 건설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실향민들은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화해 분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가슴 설레는 사람들이 바로 개성상인(松商)의 후예들이다.

''신의''와 ''근면''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경영방식으로 IMF(국제통화기금) 한파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이들은 통일시대의 주역으로 발돋움할 의지를 다지고 있다.

남한에 넘어와 빈손으로 신화를 일궈낸 송상 특유의 저력을 앞으로는 고향(개성)을 발전시키는 데 쏟겠다는 다짐이다.

더욱이 개성 출신의 경제인들은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어 개성과의 ''길''이 시원하게 뚫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허채경(작고) 한일시멘트 회장 일가는 손꼽히는 송상 집안이다.

허 회장은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16세 때부터 제철소와 광산 등에 갱목을 납품하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전쟁으로 단신 월남,수산물을 판매해 돈을 모은뒤 1960년 서울에서 한국양회판매주식회사를 차렸다.

그의 성실성과 사업수완을 눈여겨봤던 개성 출신의 이정림(작고) 전 대한유화 회장 등의 도움으로 1961년 한일시멘트를 설립했다.

입찰과 종업원 채용을 공개경쟁으로 하고 인사에서 혈연을 철저히 배제하는 ''송상 경영''으로 유명했다.

한일시멘트공업은 창업주의 장남인 정섭(61)씨와 3남인 동섭(52)씨가 경영중이다.

차남 영섭(59)씨는 일찌감치 독립해 생명공학 전문기업인 녹십자를 창업했다.

송상의 후예답게 부채비율 40%의 내실경영으로 주목을 끌고 있으며 평양에 유로키나제 공장을 세우는 등 대북 투자에도 앞장서고 있다.

4남인 남섭(49)씨는 서울랜드를 경영하고 있다.

신도리코 창업자인 우상기(81) 회장도 대표적인 개성출신 경제인.

1962년 서울의 각 구청에 복사기를 납품할 때 지게꾼들과 함께 직접 복사기를 져 나를 정도로 불필요한 경비지출을 용인하지 못하는 성격.

창업이래 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진기록도 ''무차입 경영''이라는 우 회장의 일관된 경영관의 결실이다.

서성환(77) 태평양 회장도 송상 정신을 실천한 전형적 인물.

황해도 평산 출신이지만 소학교 1학년 때 개성으로 이주했다.

잡화 도매상을 운영하던 선친밑에서 일을 배운뒤 당시 개성의 고려백화점에서 화장품점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1962년 서울 신대방동에 공장을 짓다가 파산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으나 거래처들이 선수금을 제공, 위기를 극복했다.

이회림(83) 동양화학 명예회장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광산과 시멘트업체,서울은행 등을 소유했었으나 대부분 정리하고 30년 이상 공업용 기초화학제품 생산에 전념하고 있다.

흔히 이 회장을 ''마지막 송상''이라고 부른다.

한국빠이롯트 고홍명(82) 회장은 97∼98년 5대 시중은행의 비상임이사에 선임될 정도로 은행 지분이 많았지만 필기구 제조업 외에 한눈을 판 적이 없다.

이밖에 송상의 정신이 배어 있는 기업으로 서흥캅셀(양창갑) 한국제지(단사천) 한국화장품(김남용,작고) 등이 꼽힌다.

이들의 사교장은 현재 두산빌딩 자리인 개성상회였다.

지하 바는 중절모에 나비넥타이를 맨 한창수(작고) 회장을 비롯한 개성출신의 관·재계 인사들이 매일 모여 잔칫집 같았다고 한다.

개성상회는 한때 번창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데다 정치적 탄압까지 받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윤진식·정종호 기자 js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