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거버넌스 혁신, ESG 파고를 넘는 법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한국의 기업가치는 싸다. 너무 싸다. 외환위기 당시 대한항공의 시가총액은 2억4000만달러였다. 보잉 747 100여 대를 보유한 ‘대한의 날개’ 값이 그랬다. 삼성전자는 12억달러만 주면 최대주주가 될 수 있었다. 주식 폭락 사태에서 대기업집단의 상호출자가 빚은 결과였다. 지금은 투기자본이 얼씬도 못하게 지배구조가 개선됐다.

선단식 대기업집단은 일본과 한국에만 존재한다. 한국이 제조업 최강국으로 올라서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반도체 무용담은 유명하다. 은행이 상호출자를 주관하는 일본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한국은 위험천만하고 신속한 용단을 내렸다. 결과는 반도체 1위 등극. 그런데 한국은 언제까지 총수의 결단에만 의존해야 할까? 역으로 독점 부작용과 리스크를 맹비난하는 ‘대기업집단 해체’ 구호는 여전히 유효한가?

공과(功過)를 모두 고려한 현실적 답은 ‘변신’이다. 지배구조의 일대 변혁. 이것이 요즘 세간의 화두인 ‘거버넌스 스토리(governance story)’다. 오너리스크 축소, 상호출자구조 개편, 계열사의 자율성과 책임성 강화가 요체다. 저평가된 기업가치를 높이고 경제권력의 분산 요구에 적극 부응하는 진취적 발상이다.

21세기 글로벌 기업의 목표는 바뀐 지 오래다. 이익 극대화는 낡은 명제, 사회적 가치 내지 공익 생산에 주력해야 살아남는다. 주주, 고객사, 투자사, 소비자가 감시의 눈을 뜨고 지켜본다. 문명의 문법이 공유와 공존으로 바뀌었다.

10여 년 전, SK 워크숍에 참석한 적이 있다. 미래 비전을 탐색한 회의였는데 당시 최태원 회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행복’이 어떠냐고. 행복? 글쎄. 참석자들의 반응이 그랬다. 글로벌 일류, 변혁과 미래 개척 같은 거대 담론을 기대했던 참석자들은 행복이란 귀여운 단어에 미소로 답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그는 사회적 기업을 꺼내들었고 결국 ‘사회적 가치’호(號)를 출항시켰다. 21세기 문법에 먼저 개안한 그의 화답이었다. 근육질 공장을 보유한 포스코는 ‘제철보국’에서 ‘기업시민’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시민생계를 책임진 경제시민과, 공익 확산에 매진하는 교양시민의 쌍두마차 역할을 다 하겠다는 포부다. 사회적 가치가 경제 가치로 직결되는 시대의 화두에 답하는 재계의 고동 소리가 반갑다. 그것은 요즘 전 세계에 몰아치는 ESG 경영의 쓰나미를 넘는 한국적 대안이기도 하다.

E(환경), S(사회), G(지배구조)를 변혁하라는 지구촌의 외압은 글로벌 기업의 명줄을 죌 만큼 거세다. 초점은 지구살리기(E), 사회적 권리개선(S), 지배구조의 공정성·투명성 증진(G)인데, 세계 최대 투자사 블랙록은 ESG 업적평가로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고 이미 공표했다.

대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유럽연합(EU)은 4만9000개 기업의 ESG 성과정보에 따라 세금 차별부과 방침을 공시했고, 영국 역시 대기업의 기후 관련 재정을 재무제표에 공개하도록 명시했다. 조금 늦지만 한국은 2025년부터 ESG 지표 공시를 입법화했다. 유럽에서 내연 자동차의 생산과 수입은 곧 중단된다.

사회적 가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E와 S의 성과가 결국 거버넌스(G)로 좌우된다는 사실에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왜 그럴까? 거버넌스의 자율성과 책임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E와 S의 어떤 개혁도 추진되지 못한다. 이사회 구성과 역할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이사회 중심 경영’이 바로 거버넌스 스토리의 핵심이다.

오너에서 이사회로 권한 이전이 가능할까? 선진국은 그렇게 한 지 오래다. 미국은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한 기업이 55%에 달하고 사외이사 비율은 80%를 넘었다. 사외이사가 거수기라는 우려는 ESG 쓰나미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외이사가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기업도 한국 경제도 죽는다. 이게 거버넌스 혁신이 뜻하는 중단기적 비전이자, 대기업집단 해체에 담긴 과(過)를 해소하는 먼 여정의 힘찬 출발이다. 재계의 열풍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