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끄저께 새벽 소행성(小行星)이 지구를 아슬아슬 스쳐 갔다. 축구장 두 배 크기의 이 천체가 지구와 충돌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난 15일엔 러시아 중부에 유성우(流星雨)가 쏟아져 그 후폭풍에 1000명 이상이 부상했다. 천문학자들은 두 사건이 서로 무관하다지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는 천체에는 우리 지구와 같은 큰 행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소행성들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끄저께 지구에 접근했다가 달아났다. 최접근 거리는 약 2만7000㎞였다니 우리의 ‘천리안 위성’(고도 3만6000㎞)보다 더 가까웠다. 최근 발사된 ‘나로 과학위성’ 고도 2000㎞보다는 멀지만…. 이 소행성은 초속 7.8㎞, 즉 총알의 10배 속도로 지구를 스쳐 지나갔다. 이 정도의 소행성 접근이 40년에 한 번씩은 일어나고, 1200년에 한 번은 지구와 충돌할 수도 있다고 한다. 지구와 충돌했다면 원자탄 수백 개의 폭발력을 보였을 듯하니, 슬쩍 피해간 것이 고맙다.

그와 달리, 그 전날 러시아에 떨어진 유성우는 원래 큰 운석(隕石·流星·별똥)이 지구로 낙하하다가 대기권에서 작은 조각으로 부서져 불벼락으로 떨어진 경우다. 모스크바 동쪽 1500㎞ 우랄산맥 지역 첼랴빈스크에는 3700채의 건물과 많은 교육문화 시설이 부서졌고, 1200명이 부상했다. 이번 유성우의 파괴력은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33배가 넘는다지만, 폭발지점이 지상 24㎞나 돼 피해가 적어졌다. 근처에는 핵시설도 있는데, 만약에 거기 불벼락이 내렸다면 어땠을지 끔찍하다. 그래도 복구비용이 우리 돈으로 36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6일 긴급 지원명령을 내려 민방위대원 2만여명과 항공기 7대를 투입했다.

지구상에서 유성우는 끊임없이 떨어지고 또 제법 피해를 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 천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소행성이나 유성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런 지식은 17세기 이후 현대과학이 발달하고, 특히 망원경과 전파망원경을 이용하게 되면서부터 생겼다.

하지만 19세기 이전의 우리 역사에도 유성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첫 유성 기록은 기원 14년(신라 남해왕 11년)에 보인다. 거의 2000년 전의《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별똥별이 떨어지자 마침 그쪽에서 침입하던 왜적이 스스로 물러갔다고 한다. 유성우도 아주 이른 때부터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기원 104년(신라 파사왕 25년)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지만 지상에는 이르지 않았다고《삼국사기》는 전한다. 삼국시대에 수십 회 정도 기록된 유성과 유성우 현상이《고려사》에는 모두 547회나 남아 있다. 조선 초《세종실록》에는 ‘별이 하늘 한가운데에서 불처럼 동방으로 흘러갔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有星如火, 自天中流東方, 聲如雷)’는 기록(1429년·세종 11년 5월)이 보인다. 단순한 유성인지 유성우인지 분명하지 않다.

가장 흥미로운 경우로는 고려 명장 강감찬(948~1031)이 태어날 때 유성이 떨어졌다는 기록이다. 그의 탄생 설화는 오늘날 그의 사당 이름으로 남아 있다. 지금 서울의 전철역 낙성대(落星臺)란 바로 근처에 있는 그의 사당 이름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같은 유성이 이순신(1545~1598)의 경우는 그의 죽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명나라 장수 진린(1543~1607)과 이순신이 퇴각하는 왜군과 마지막 결전을 위한 기도를 마쳤을 때였다. 은하수에서 큰 별이 땅으로 떨어졌고, 모두가 이를 불길하게 여겼더니 그날 싸움에서 이순신이 전사했다고 그의 신도비에는 적혀 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소행성은 몰랐고, 유성이나 유성우는 열심히 관찰했으나 그 의미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차라리 과학이 없던 옛날이 그립다.

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parkstar@unitel.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