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채 KT 회장(64)의 첫인상은 부드럽다. 온화한 표정에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만나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말투엔 자신감이 넘쳐난다.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힌다. 민감한 이슈라도 속에 담아 두지 못하는 성격 탓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그의 달변에 흠뻑 빠져들기 일쑤다. 최신 통계와 트렌드를 줄줄 꿰고,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으로 대화를 주도한다. 춘추시대의 패자인 진나라 문공,북송시대 왕안석의 개혁 실패 이야기는 단골 메뉴다.

거침없는 발언도 트레이드 마크다. 이 회장은 지난 6월1일 통합KT 출범식 기자간담회 도중 불쑥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으로부터 경영 기법을 배우겠다"고 말했다. '회사에 득이 된다면 적에게서도 배우겠다'는 지론을 말한 것이지만 부하 직원들은 바짝 긴장해야 했다. 그는 또 250여명의 협력업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상생방안 발표 행사에서 "KT와 사업하면 망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불필요한 관행과 비리 때문에 비용은 비용대로 들어가고 제품도 망가졌다고 하더라"며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기도 했다.

이 회장은 화려한 이력을 지닌 정통 관료 출신이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경복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1969년 행정고시 7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장,농림수산부 차관,재정경제원 차관을 거쳐 1996년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는 등 요직을 섭렵한 최고의 엘리트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4~91년,1996~97년 두 차례에 걸쳐 10년 가까이 청와대에 근무한 기록도 갖고 있다. 과장 시절엔 뛰어난 기획력과 브리핑 솜씨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대통령 비서실 경제비서관을 지내며 '장관급 과장'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좌절도 맛봤다. 1997년 청와대 경제수석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10년간 '야인(野人)' 생활을 했다. 정통부 장관 시절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특정 업체를 도왔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지만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능한죽(凌寒竹 · 대나무같이 어려움을 능히 견디라)'이라는 옛 선조의 글귀를 새기며 마음을 달랬던 시기다. 정부를 떠난 뒤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LG전자 등 여러 기업의 사외 이사를 지냈다. 돌이켜보면 최고경영자(CEO)가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KT호의 선장을 맡은 지 6개월.그간의 행보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1월14일 취임과 동시에 비상 경영을 선포하고 본사 인력 3000명을 현장으로 내려보냈다. 취임 6일 만에 KTF와의 합병을 결정,4개월여 만에 통합KT를 출범시키는 등 추진력을 발휘했다. KT가 2002년 민영화 이후 겪은 7년간의 변화를 능가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내부 비리와의 전쟁에도 나섰다. 검사를 지낸 정성복 윤리경영실장을 영입,협력업체로부터 금품수수 혐의가 있는 임직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공기업 잔재로 여겨져 온 연공서열 인사제도와 호봉제를 없애고 성과연봉제를 도입했다. 숨가쁘게 진행된 변화의 속도에 임직원들은 혀를 내둘러야 했다.

저돌적인 경영 스타일 때문에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의외로 잘 듣는 스타일이다. 직원들의 자유로운 토론을 유도하고 명쾌하게 정리하는 쪽에 가깝다. 오랜 관료 생활 동안 숱한 보고와 토론을 경험해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방둥이'인 이 회장은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활동적인 성격이었다. 리더십과 보스 기질은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시절부터 나타났다. 고위 경제 관료를 지낸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강봉균 민주당 의원,이기호 전 노동부 장관 등이 동기다. 이 회장은 토론을 즐긴다. 주말마다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임직원들과 난상 토론을 벌인다.

즐겨 읽는 책은 사마천의 '사기열전' 같은 역사서다. 이 회장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됐다는 얘기"라며 "역사적 경험에서 지혜를 빌려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CEO 내정자 시절엔 C K 프라할라드 미시간대 교수가 쓴 '새로운 혁신의 시대'를 탐독했다. 임직원들은 새 CEO의 경영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국내에 출간조차 안 된 책을 원서로 구입해 읽어야 했다.

그는 대기업 회장임에도 격의 없고 소탈한 면모를 보인다. 정장보다 노타이를 즐기고 수행 비서 없이 훌쩍 나가 사람을 만날 때도 많다. CEO 내정자 시절에는 늘 운전기사와 함께 구내 식당에서 식사했다. 토요 토론이 있는 날이면 직원들과 자장면,탕수육으로 점심 식사를 즐긴다.

그는 맥주 잔에 양주 대신 소주를 넣는 '소주 폭탄주'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1996년 청와대에 근무할 때였다. 이 회장은 "국내 원료를 쓰는 소주를 먹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내가 하는 초청 모임은 무조건 소주 폭탄주로 했다. 음식점도 1인당 1만원이 안 넘는 데 갔다"고 회고했다. "잊고 있었는데 2002년 검색 엔진을 돌려 보니 소주 폭탄주의 원조라고 나오더라"며 웃었다.

이 회장에게는 손자와 영상 통화를 하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매일 팔굽혀 펴기와 맨손 체조를 하는 것도 커 가는 손자를 더 많이 안아 주고 싶어서란다. 이 회장은 얼마 전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올레(Olleh) 경영'을 발표했다. 헬로(Hello)라는 영어 단어를 거꾸로 쓴 것이 올레다. 혁신적인 사고를 통한 역발상 경영을 통해 성장 정체에 빠진 KT에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