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234개 향교와 유림을 대표하는 최근덕 성균관장은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다. 경남 합천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5세부터 서당에서 천자문과 사서삼경을 읽은 마지막 '서당 세대'다. 서당 시절 글을 외우는 능력이 비상해 남들이 서너 줄 외울 때 20~30줄을 외웠고,천재로 불렸다.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 다닐 때 소설을 쓰기 시작해 경향신문 · 동아일보 · 현대문학 등의 작품 공모에 잇달아 당선되며 '최남백'이라는 필명을 날렸다.

문학청년 시절 소설가 김훈씨의 부친인 김광주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고,'신동아'에 조선후기 농민반란 지도자를 다룬 소설 '홍총각'을 7년 동안 연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신태양''명랑' 등 잡지 기자로 일하면서 영화배우 김지미를 비롯한 연예인과 조병옥,김도연,민관식 등 당대 거물 정치인들을 인터뷰했다. 가야금 명창 황병기 선생과 '문조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최 관장이 다시 유학의 세계로 돌아온 것은 40대 후반.빼어난 한문 실력 덕분에 당시 막 문을 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고전번역연구실로 불려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수실장,고전연구실장 등으로 5년여 동안 일하다 50대 중반에 성대 동양철학과 부교수로 발탁됐다.

'유교의 현대화'를 주제로 거침없이 달변을 토하는 그의 강의는 인기 만점이었고 '유교개혁'은 그가 지금도 주창하고 있는 화두다.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정좌(靜坐)수행을 하고 '논어'를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현대화 · 정보화 · 과학화 ·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유교도 변해야 하며 유림의 의식구조부터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정치이념으로 변질된 조선시대 유교에서 벗어나 인의(仁義)와 도덕을 중시하는 공자 · 맹자 시대의 유교로 돌아가자는 유교의 공맹화와 한국화 · 종교화 · 대중화를 유교개혁의 4대 원칙으로 제시하면서 쇠락해가는 유교정신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