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기업활동의 모든 것을 국제기준에 맞춰야 한다는게 당연시된다. 그러나 불과 몇년전만 해도 한국기업들의 상당수는 국제기준에 무지했다. 오죽하면 방만한 외화차입으로 IMF사태까지 겪었는가. 요즘도 글로벌 경영을 논할 때면 옛 이야기가 새삼 떠오르곤 한다. 지난 1982년 코오롱에서 부장으로 재직하며 산업자재부문을 담당할 때였다. 외국을 다녀온 이동찬 회장(현 명예회장)이 인조잔디 샘플을 갖고와 "한번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섬유분야에서 국내 최고를 지향한다는 코오롱이 이 정도도 못만들랴"는 생각에 개발에 몰두,84년에 인조잔디 상품화에 성공했다. 상품화에 자신감을 얻게되면서 86년 아시안게임을 겨냥한 수주전에 뛰어들었다. 필드하키가 열리는 성남운동장에 인조잔디를 까는 프로젝트였다. 당시에는 독일의 폴리그래스등 외국계 업체들이 앞선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경기장 건설에는 조금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국산을 쓰자는 분위기가 형성된데 착안한 것이다. 85년부터 프로젝트에 착수했으나 세계하키연맹의 공인을 받는 부분에서 벽에 부딪혔다. 공인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인조잔디가 깔린 곳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문제는 당시에 국내 어디에도 그런 운동장이 없었다는 점. 아시안게임 조직위를 만나 설득작업에 나섰다. "운동장 공사를 마친뒤 국제공인을 받지 못한다면 외국업체들이 인조잔디를 다시 까는 비용까지 대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85년 5월 경기장을 완공하고는 공인작업에 매달렸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아디다스등 외국계 기업들은 세계 체육단체들의 각종 행사를 후원하고 로비스트를 통해 합법적으로 PR활동을 벌이는등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지만 코오롱은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고 잠을 못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인조잔디가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편도 아니었는데 괜한 일을 벌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벨기에 소재 하키연맹을 수시로 드나들며 제품의 장점을 소개하느라 공을 들여야 했다. 조사장비를 공수해오는데 3만달러의 항공비를 대주기까지 했다. 그해말에야 겨우 공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뒤 코오롱글로텍으로 넘어간 인조잔디 사업은 파주 월드컵 트레이닝 센터에 3개의 인조구장을 까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국제공인에 대한 경험은 98년 코오롱유화를 맡게 되면서 효험을 봤다. 코오롱유화는 육상트랙등에 쓰이는 폴리우레탄수지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국제육상연맹의 공인을 받았다. 덕분에 내년도 열릴 유니버시아드 경기의 주경기장인 대구종합운동장 공사를 따낼수 있었다. 정리=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