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조합원들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당장 급여가 줄어드는데도 예상했던 "반발"보다는
오히려 "어쩔수 없다"는 입장이니 말이다.

현장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회사의 조업단축 조치가 임.단협을 앞둔 제스추어가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눈이 있는데요.

저도 12년째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렇게 쌓인 재고는 처음이에요"

8일부터 조업단축에 들어가는 승용3공장 고병설 반장의 이야기다.

공장을 돌리기 위해 자신도 차를 팔러 나서겠다는 각오지만 "영업사원들도
못하는데 잘될지..."라며 안타까워하는 고반장의 표정이 진솔해 보인다.

사실 자동차산업이 이처럼 침체된데는 회사와 함께 근로자들의 책임도
없지 않다.

과도한 임금부담도 그렇지만 때만 되면 홍역처럼 앓아야 하는 분규도
경쟁력 약화에 적지않은 역할을 했다.

"이걸 보세요.

기아자동차 근로자들의 평균임금이 영국 로버사와 같지 않습니까"

김영귀 기아자동차 사장은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통계메모를
내보이며 목청을 높인다.

시간당 임금이 기아는 11달러인데 비해 영국 자동차업계는 11.8달러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오히려 8~10달러로 오히려 낮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근로자들만 나무랄 성질도 아니다.

더 섭섭하게 느껴지는 것은 업계의 현실을 무시하고 갈수록 조이기만
하는 정부정책이다.

"재고가 산더미지만 지프는 제법 팔렸지요.

치솟는 휘발유값에 비해 경유값이 아직 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울시가 지난달 20일부터 지프 자동차세에 대한 감면액을
축소했어요.

당연히 판매가 곤두박질쳤지요"

지프 생산업체의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환경문제라는 서울시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지만 불황에 허덕이는
자동차업계로서는 엎친데 덮친 격이 아닐수 없다.

얌전한 한국자동차공업협회가 지난 2일 기자회견을 열어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외친 것도 따지고 보면 정부 규제의 도가 지나치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유차에 매연여과장치를 의무적으로 붙이라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치가 대당 3백만원이 넘는데다 2년마다 한번씩 갈아줘야
해요.

이래서야 누가 디젤차를 삽니까"

협회 오승채 이사의 볼멘 소리다.

게다가 2000년부터는 일정량의 압축천연가스차를 의무적으로 생산, 팔도록
한다는 것이 정부의 안이다.

세계적으로 환경규제가 가장 엄격한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규를 우리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업계로서는 차량가격이 비싸고 개발능력도 미흡한데다 수요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이 차의 생산을 의무화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1가구 2차량 중과세, 유류 특소세 인상, 유류 특소세교육세 신설, 도심
혼잡료 징수 확대 등도 이해는 가지만 사실은 하나같이 업계를 위축하는데
일조하는 정책이다.

각종 규제와 과도한 세제는 이밖에도 헤아릴수 없다.

이 가운데는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 규제"도 없지않아 대의앞에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업계관계자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물론 자동차 홍수가 사회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수를 죽이는 정책은 곤란해요.

이대로 가다간 산업 기반이 뿌리째 흔들릴게 뻔합니다"한 업계중진의
불만이다.

사실 자동차산업은 내수 기반이 매우 중요하다.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우선적으로 내수시장에서 팔려야 한다.

대표적인 스케일 메리트 산업이어서다.

무조건 해외에 내다팔라는 것은 그래서 무리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생산량의 50%이상을 해외시장으로 수출한다.

자기 나라에서 만든 자동차를 이렇게 수출해대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일본
독일을 포함해 고작 3개국뿐이다.

더욱이 지난해 우리나라의 무역적자는 2백4억달러였지만 부품을 포함한
자동차산업의 무역흑자는 1백12억달러에 달했다.

적자폭 축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산업이다.

물론 자동차업계라고 다 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환자"는 치료해놓고 봐야 한다.

근로자들은 일방적인 요구를 더 이상 자제해야 한다.

회사 없는 노조는 없질 않는가.

회사도 보다 투명경영에 힘을 쏟아야 한다.

정부 역할도 마찬가지다.

이젠 업계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쌓여가는 재고를 바라보는 자동차업계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 김정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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