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답답한 나머지 윤정우계장을 불렀다. 다음은 윤계장의 당시 회고담.

"약 1년반 동안 통행금지 시간전에 집에 간적이 없습니다.
전기공업과장은 너무 자주 바뀌었고 전자공업에 대해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와 최성규씨(현 생산기술연구원 부원장)가 매일 야근을 했어요.
당시 통행금지 시간은 밤11시여서 10시15분까지 근무하면서 자장면 한
그릇으로 저녁을 때우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화곡동 집에 도착하면
통금이 지난 밤12시였죠. 갓 결혼한 때였는데 신혼의 재미를 모르고
지냈습니다. 처는 몸걱정 하라며 다른 과로 바꾸라는 거예요. 저도
딴곳으로 옮겨 달라고 국장에게 여러차례 이야기 했지요. 건강도 나빠진
것이 사실이구요.

70년 말에 직원 한사람이 증원,3명이 일하게 됐는데 퇴근은
마찬가지이더군요. 업무량이 자꾸 늘어만 갔어요. 매일 그러니
중앙청(광화문)청사 관리관이 좀 이상하게 느꼈나봐요. "어떤 미친놈이
1년 반동안이나 매일 야근이야. 그것도 하루같이 10시15분까지 남아
있는거야"하면서 수위를 대동하고 불시 검문을 하러 온적이 있었으니까요.
이런 일이 있은후 중앙청 수위는 동정 어린 눈으로 잘보아 주더구만요.

우리나라 공무원 중에서 야근을 제일 많이 했다고 확신합니다" 내가 "무슨
일이 그다지 많았소. 일을 FIC등과 분담했으면 됐을게 아니오"하고 물으니
윤정우씨는 답답하다는듯 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때는 전자공업이
막 붐을 일으키기 시작할 때인데 오죽이나 일이 많았습니까. 전자제품의
수출 수입업무 공장허가업무 시설기자재 수입문제 외자도입문제 외국인
투자문제, 특히 삼성전자의 국내 판매문제등등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일감이 생겼어요. 이런 업무는 상공부 고유의 행정문제라 누구에게
부탁할수도 없는 것이었어요. 당시 전자공업담당정책부서는 전기공업과의
한 계에서 2~3명이 전부 해결해야 했지요. 그러던차에 전자공업진흥법이
공포됐습니다. 법하나가 생기면 이에 뒤따른 세부 절차 마련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행령 시행세칙 시행요령이 모두 제정되고 공포되어야
하잖아요. 매일 야근할수 밖에 없었어요. 거기다 일상 행정업무는 업체와
직결되는 것이니 먼저 처리해야 했지요. 자연히 법과 관련된 여러가지
부수 조치가 늦어졌습니다. 당시는 일감이 너무 쌓이고 쌓여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1년여가 지나간
것입니다"윤정우씨는 말을 계속한다.

"70년1월 오차관보(필자)가 기획관리실장에서 관공전 차관보로
전임했어요. 하루는 저에게 전자공업의 추진상황을 보고하라고 해
그때까지의 진척상황을 보고하니 안색이 변하더군요.

전자공업진흥 8개년계획의 첫번째 절차인 29개 전자부품에 대한
개발공장건설자 지정및 동 지원요령 공고도 안했느냐고 묻더군요. 제가
아직 못했다고 하니 큰일 났구만 하면서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면
상공부장관이하 전 상공부 직원의 모가지가 열개 있어도 모자란다고 기합을
막 넣어요. 딴일 다 집어 치우고 이 일부터 밤을 새워서라도 하라는
것이었어요. 이때 일이 너무 많았던 문국장은 부하직원들을 생각해 "더
이상은 못합니다. 기합도 받고 처벌도 받지요"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오차관보는 홧김에 나에게 "너는 상공부 직원이기 전에 학교 후배야.
후배는 선배 시키는 대로만해"하고 야단을 쳤어요.

부품개발업자 지정공고는 이런 과정을 거쳐 계획보다 1년반이 지나서
(71년초) 공고됐습니다. 공고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해 지더군요.
공고가 늦었더라면 큰일날뻔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가 생겼다면(즉 대통령의 지적이 있었다면)이낙선장관의 불 같은
성격에 몇사람 다쳤을 것으로 압니다. 물론 첫번째 대상이 저지요.

이런 사정이 상부에 반영되어 71년7월4일에 전자공업담당관(과장급)실이
신설되고 제가 이자리에 승진했지요.

계장급이 진급하면 우선은 외청(본청이 아니고 외부청)에 가게 되는데
저는 맞바로 본청에서 진급 되었습니다. 인원도 7명으로 증원됐고요.
그후로는 일도 좀 편했습니다"
여하튼 그 당시 전자공업 담당자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전자 기술자로서 행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고 또 전담정책부서
확대및 증원도 쉽지 않았다.
행정부에 과하나를 신설하려면 직제를 개편하고 예산이 나와야 이루어지니
1~2년이 걸려야 가능하다. 딴과에서 협조를 구한다는 것도 그 당시는
모두가 바쁠때이니 쉬운일이 아니었다. 장관이 임시 조치를 해줄수도
있겠지만 이런 예는 특별한 케이스이다. 이낙선장관이 부임한지 얼마
안됐고 수출10억달러 달성에 총력을 기울일 때이니 전자공업육성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김정 상공장관이 상공부를 떠난 것이 무척 아쉽게 생각된때가 바로
그당시이다.

전자공업육성은 위로 박대통령과 밑으로는 윤정우계장이, 즉 단둘이서
뛰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전자공업육성에 행정이 미처 못 따라
갈때여서 나는 중간에서 안절부절 못했었던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되돌아보면 이런 행정진공상태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감개가
무량하다.

내가 갖고있는 수첩을 들여다 보니 전자공업에 대한 융자금이 69년에 새로
책정되어 1억8백만원, 70년 3억원, 71년에는 9억원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전자공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매년 공장이 늘어 갔다.
전자공업 30년사에서 보면 62년 우리나라 총 제조업체수 1만9천4백75개중
전자업체는 21개로 0.1%를 차지한다. 66년에 가서도 전자업체수는 1백개가
못되는 70개로서 0.3%에 그쳤는데 이것이 71년 0.9%, 76년 2%, 81년에는
2.4%를 점하게 됐다. 그후는 변동이 거의 없다.
한마디로 전체업체수는 71년을 전후해서 급격히 증가하는등 전자공업진흥
8개년계획기간중에 전자공업이 정착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개척기를 전자공업진흥 8개년계획 기간으로 잡는다.
그때 고생했던 여러사람의 공을 다시하번 생각하게 된다. 전자공업
개척시대에 우리나라 전자공업발전을 위해 주야로 열심히 일했다는 보람과
긍지를 갖고 그것으로 위로받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