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정부의 제약성때문에 결단을 내릴수없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도 꼭
딛고 넘어서서 결단을 내야할 중대한 사안이었다.

미국의 경제원조당국이 61년도 편성예산을 한국정부와 공동으로
심의하자고 나선것이다. 종전에는 미국의 원조와 관련된 대충자금예산은
별도의 계정으로 독립,일반회계예산에서 분리돼있었다. 그런데 61년도
편성예산을 미국의 원조당국과 공동심의하자니 이는 과도정부의 권한에서
완전히 벗어난 문제였다.

무엇보다 다음 회계연도의 예산편성은 멀지않아 탄생할 새정부에서 할
일이고 또 그 심의도 새로 구성되는 국회에서 해야할 일이 아닌가.

공동심의하자는 제안을 섣불리 받아들여 그것이 관행으로 굳어진다면
헌법에도 저촉될수있는 중대한 사안인것이다. 따라서 그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기가 적절하지않다고 완곡히 거절했다.

거절을 당한 원조당국도 기분이 좋을리는 없었다. 정부예산의 공동심의가
내정간섭이라고 한다면 한국정부가 원조를 요청하는것도 미국에 대한
내정간섭이 아니냐고 항변을 하는것이 아닌가. 그와같은 항변도 일리가
있으니 전적으로 거부만은 할수없는 처지이기에 피차가 납득할수있는
대안을 내기로했다.

며칠후 대안을 만들어 원조당국에 전달했다. 서로가 법적으로 구속을
받는 편성예산의 공동심의 대신에 편성의 방침이나 규모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자고 제안했다. 이와같이 법적구속력이 없는 대안에 미국에서는
몹시 기분이 상했던것 같다.

그래서 국무총리를 직접 찾아가 불평불만을 터뜨렸나보다. 하루는
허총리가 급히 오라고해서 집무실로 가뵈었더니 진노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나 노여움이 컸던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변명할 틈도 주지않는다.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고서 한달이 훨씬 넘은 뒤였다.
미국측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61년편성예산을 공동심의하자는 것이 아니고 미국이
대한원조예산을 편성하는데 참고자료로 필요하니 예상할수 있는 편성예산의
규모와 방침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당연한 요구라 생각해서 쾌히
응낙했다. 때마침 선거가 끝나서 다음에 들어설 정부도 짐작할수 있었다.
민주당이 절대다수가 당선되었으니 이곳과 접촉,비공식적이나마 양해를
얻어내면 제대로 절차를 밟았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윤장관에게 상의를 했다. 허총리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서 그런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것 같았다. 부득이 장관의 양해를 얻어 내가 직접
나설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허총리를 만나 저간의 사정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그전의 일도 있고해서 나로서는 비장한 각오로 임했는데 나의
설명을 귀담아 들은후 쾌히 승낙을 했다. 그뿐아니라 매사를 그렇게
과감하게 추진하고 처리해야한다고 칭찬까지 했다. 나에 대해 품었던
오해도 완전히 풀린것 같다. 그러기에 칭찬이 컸는지도 모른다.

원래 허총리는 20년대에 나의 선친과 함께 미국에서 삼일신보사를
경영했고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깊은 친교가 끊이지 않아 나도 어릴때부터
그분을 잘 아는 처지다.

그래서였는지 허총리는 나에게 흉허물없이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이
혼란중에 재정수지의 균형만을 고집하는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돈을 풀지않다가 선거에서 좌익세력이 대거진출하면 돌이킬수 없는
정치적과오를 범하게 된다며 질책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허총리가 더구나 과도정부가 끝나갈 무렵에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니 참으로 고무적이었다. 허총리의 승낙을 얻은것을 윤장관에게
보고하고 그길로 주요한의원댁을 찾아갔다. 주의원은 경향신문에서 같이
논설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잘 아는 분이지만 실은 같은 동네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내왕이 있었다.

주장관은 그당시 민주당 정책위원회의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분과
상의하는것이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했다.

당선 축하인사에 이어 우선 찾아온 연유부터 설명했다. 또 개인의
자격으로 온것이 아니라 총리의 승낙을 얻어 과도정부를 대표해서 왔으며
준비해온 61년도 편성예산안을 브리핑할터이니 민주당을 대표할만한
중진들과 회의를 했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 또 민주당에 신구파가
있으니 양파를 대표해서 같은수로 구성했으면 좋겠다는 뜻도 전했다.

며칠후에는 한국은행회의실에서 민주당 중진들과 회동하게 됐다.
민주당에서는 정책위의장인 주요한의원을 비롯 김영선 이충환의원등
여섯명이 나왔다. 과도정부를 대표하여 윤 병 전례용 두장 관이 나왔고
나는 간사 자격으로 회의를 주선하고 이한빈 예산국장이 직접 브리핑을
했다. 이국장의 부리핑도 좋았지만 민주당중진도 오랜 의회경험으로
이해가 빨라 별 어려움없이 합의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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