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경찰에 검거된 이승완씨는 3,000여명의 부하를 거느려 "용팔이패의
왕초", "극우단체지도자", "조직폭력배의 대부"로 널리 알려졌으며 생존을
위해 정치보호막이 필요하다는 신조를 갖고 있던 정치폭력배였다.
*** 중고태권도 연맹회장 전국고단자회 회장등을 지내 ***
이씨는 전주북중 2학년때부터 태권도를 시작, 전국대회를 휩쓸었던 태권도
9단의 무도인 출신으로 이리 원광대법학과 2년을 중퇴하고 군복무를 마친뒤
해병대 태권도팀을 맡아 해병대팀을 대통령배쟁탈 태권도대회에서 5연패하게
해 명성을 휘날렸으며 이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중고태권도연맹회장, 전국
고단자회 회장, 전국지도관 총관장직등을 지냈다.
70년대중반 정계의 이모씨와 친분을 맺으면서도 중앙무대로 활동무대를
넓힌 이씨는 무술력과 뛰어난 처세술로 전남출신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던
호남파 주먹세계를 잠식했다.
** 파렴치한 행동피하고 경제적독립 추구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 맺어 **
이씨는 파렴치한 행동을 피하고 경제적인 독립을 추구하는등 기존의 폭력배
들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이 때문에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씨는 평소 "주먹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는등 정치적 성향을 보여 다른 광주파 패밀리등이 그의 조직을
경원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70년대초 서울 명동일원에서 주류유통업에 손을 댔던 이씨는 그후
서울방배동에 덕유산업이라는 광고기획실을 차려놓고 자신의 조직과 이미지
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쓰기도 했다.
** 88년 8월 호국청년연합회 창설 지난해 8월 총재직에서 사임 **
일찌감치 정치의 위력을 깨달았던 이씨는 용팔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지난 88년 7월7일 호국청년연합회를 창설하면서 공개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호청련측의 폭력배 정화사업이 언론에 질타를 받자 지난해 8월 총재직에서
사임했다.
이씨는 지난달 21일 호청련을 자체해산한 후에도 여전히 호청련비상대책
연합위원장직을 맡아 재기할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3,000여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이씨는 수배중임에도 호학력 발족식
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지난달 28일에는 리베라호텔에 경호원 20여명을
동반한채 자주 드나드는등 공권력을 의식하지 않는 행동을 해 그의 배후에
막강한 지원세력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낳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