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처럼 죽을 때까지 그릴겁니다" 10년만에 돌아온 이기봉
1억 넘어도 '완판'되는 스타 작가
해외 유명 미술관도 다수 소장
작년부터 그린 신작 50점 전시
캔버스 위 폴리 섬유 깔고 붓질
안개 피어오르는 듯 몽환적 연출
10년 전 온 슬럼프…전시 꺼려
어느 순간 '이대론 안 된다' 자성
작품 집중하려 교수직도 그만둬
신작들은 아트페어에 나올 때마다 1억원을 넘는 가격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그의 개인전 소식만큼은 도통 들을 수 없었다. 마지막 전시가 2012년(아르코미술관)이었다.
지난 17일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와 부산 망미동 부산점에서 이기봉의 개인전 ‘웨어 유 스탠드(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가 동시 개막한 건 그래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작품을 부지런히 그리면서도 개인전은 한사코 열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전시 개막일 국제갤러리에서 이기봉을 만났다.
“세상은 ‘막’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는 작품 얘기부터 꺼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지난해부터 그린 신작 50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장 초입에서는 안개 낀 물가에 있는 버드나무와 수풀 등 풍경을 그린 ‘웨어 유 스탠드’ 연작이 관객을 맞는다. 평범하게 ‘잘 그린’ 흐릿한 초록색 풍경화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작품은 ‘막’으로 덮여 있다. 캔버스 1㎝ 위 높이에 부착된 반투명 폴리에스테르 섬유다. 캔버스에 풍경을 그린 뒤 폴리에스테르 섬유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붓질을 더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설명이다.이 연작은 해외에서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다. “10여 년 전부터 안개를 소재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안개의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원래 좋아했습니다. 독일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걸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에서도 영향을 받았고요. 작업을 하다 보면 ‘안쪽에 숨겨진 그림이 더 멋있는데, 그냥 막을 씌우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양인 중에서는 분위기가 으스스하다며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러면서도 그림을 사다가 거실에 걸어놓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하하.”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묻자 그는 대뜸 철학 거장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이야기를 꺼냈다. “저자 이름과 제목이 멋있어 보여서 20년 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아직까지 읽고 있습니다. 제가 요약한 책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나 감각이라는 ‘막’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멀쩡한 작품 위에 번거롭게 폴리에스테르 천을 씌운 것도 이런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로 120㎝, 세로 180㎝의 대작 ‘패시지 투 일로직 A(비논리로 가는 길 A·Passage to Illogic A)’를 비롯한 무채색 계열의 대작들도 같은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안개 낀 물가의 풍경을 폴리에스테르 섬유 대신 ‘글자’로 덮었다는 게 차이점이다. 멀리서 보면 풍경화지만, 가까이서 보면 무의미한 알파벳들이 모여 수풀 등의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작가는 “심오해 보이지만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서양철학자가 오랫동안 반복해서 연구해온 주제”라며 “이를 그림으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했다.
“피카소처럼 죽을 때까지 그릴 것”
그가 작가가 된 과정은 다른 인기 화가들과 비슷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외골수 기질도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 자랐지만 중·고등학교에서 눈 밝은 미술 선생님들을 만나 여러 기법을 배웠다. 대회에 나갔다 하면 상을 받았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뒤에도 교수들의 인정을 받았다. “인기 화가가 충분히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전업 화가가 됐고 금방 성공했습니다. 교수도 됐죠.” 자칫 ‘잘난 척’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러나 10년 전께 슬럼프가 시작됐다. “갑자기 모든 게 지겨워지더군요. 나이가 드니 몸에 힘도 빠지고요. 지난 10년간 개인전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돈도 아쉽지 않고 신작도 계속 그리고는 있으니까 개인전을 열 필요를 못 느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정도에서 만족해선 안 되겠다’ 싶어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2016년 교수직도 그만뒀습니다. 개인전을 오랜만에 하니 마감에 쫓긴다는 점이 좋네요. 이럴 때 좋은 작품이 나오거든요.”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말에 그는 “피카소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피카소만큼 유명하고 돈이 많은 작가가 되기에는 이미 좀 늦은 것 같습니다. 다만 피카소처럼 늙어 죽을 때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제 작품은 지금도 계속 발전 중입니다. 더 잘될 일만 남았다고나 할까요. 일단 한번 전시장에 오셔서 작품을 보고 판단하세요.” 그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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