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 31일 자정 '제야의 종' 행사 때 울려 퍼지는 보신각종은 원래 조선 시대 도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었다.

매일 오전 4시에 33번(파루), 오후 10시에 28번(인정) 보신각종을 울려 서울의 사대문과 사소문이 열리고 닫힌다는 것을 알렸다.

하지만 현재 보신각에 있는 종은 조선 시대 만들어진 보신각종이 아니다.

오랜 세월 풍파를 겪으며 훼손된 보신각종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 더는 타종하기 힘들게 되자 이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1985년 새로운 종을 만들어 보신각에 걸었다고 한다.

[박물관 탐방]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정원에 숨겨진 보물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정원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는 보석 같은 공간이다.

정원 곳곳에는 보신각종 외에도 석탑과 승탑, 석불 등 국보·보물급 유물이 곳곳에 숨어 있다.

봄꽃이 활짝 핀 박물관 정원 산책로를 거닐며 숨어 있는 보물들과 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나보자.

◇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정원에서 보물찾기

박물관 정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연못과 정자가 제일 먼저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원리에 따라 조성된 '거울못'과 '청자정'이다.

[박물관 탐방]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정원에 숨겨진 보물들
청자정은 2009년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했다.

청자를 구워 만든 푸른 기와지붕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난다.

이는 '고려사' 기록에 나오는 왕궁의 정자를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거울못 왼편 대나무가 늘어선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박물관 건물 앞 열린마당이 나온다.

이곳은 누구나 '금손'이 될 수 있는 포토존이기도 하다.

박물관 중앙계단 위로 솟은 탁 트인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

날씨가 좋으면 북한산의 풍경까지 담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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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에서 야외정원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승탑과 탑비가 장엄하게 늘어서 있다.

부도라고도 불리는 승탑은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탑, 즉 승려의 무덤이다.

탑비는 승탑과 함께 세워진 일종의 비석으로, 승려의 일생과 업적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승탑의 전형적인 형태는 기단부터 탑신, 지붕돌에 이르기까지 팔각 집 모양을 한 팔각 당형이다.

이 팔각 당형의 형태를 처음 선보인 작품이 이곳에 있는 염거화상의 승탑(국보 제104호)이다.

통일신라 시대 만들어진 염거화상탑은 현존하는 승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이기도 하다.

팔각 당형의 다른 승탑들과 달리 탑신부가 둥근 승탑도 한 점 서 있어 눈길을 끈다.

마치 명품 향수병처럼 생겼다.

이 승탑은 고려 전기인 11세기 제작된 홍법국사탑(국보 제102호)이다.

둥근 형태의 승탑은 고려 말·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나타난 것으로, 고려 전기의 승탑으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양식이다.

과감하게 당대 양식을 탈피했을 뿐 아니라 기단부의 세련된 연꽃잎 장식과 용무늬, 둥근 탑신부의 꽃 매듭 장식 등도 뛰어나 아름다운 승탑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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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신각종에 숨겨진 이야기들

승탑과 탑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오면 커다란 동종이 놓인 종각이 나온다.

바로 보물 제2호 보신각종이다.

1985년 '제야의 종'에서 은퇴한 뒤 이곳으로 옮겨 온 보신각종은 500여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사연 많은 종이다.

1468년 조선 세조 때 만들어진 이 종이 처음부터 보신각종은 아니었다.

불심이 깊었던 세조가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지은 절 '원각사'에 걸었던 범종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그 자리에 기생방을 만들면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보신각종을 대신해 1619년 보신각으로 옮겨졌다.

도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 보신각은 별도의 이름 없이 종각으로 불렸다.

1895년 고종이 종각에 보신각이라고 쓴 현판을 걸면서 이 종도 비로소 보신각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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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가 본 보신각종은 크기가 꽤 컸다.

높이는 3.14m, 무게는 20t에 이른다고 한다.

이 종은 우리나라 고유의 양식으로 주조된 성덕대왕 신종과 달리 고려말부터 조선 시대까지 유행한 중국 양식을 따르고 있다.

종의 맨 위에 두 개의 용머리 장식 고리가 달려있고, 몸통에는 비천상이나 당초문 같은 문양 없이 세 겹의 굵은 띠만 둘려 있다.

그렇다면 이 종이 '진품' 보신각종이고 현재 종로 보신각에 있는 종은 '모조품' 혹은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1985년 새로 만들어 보신각에 건 종은 중국 양식을 따른 보물 제2호 보신각종을 복제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범종 양식에 따라 새로 제작한 종이기 때문이다.

전기수 해설사는 "두 종을 진짜, 가짜로 나누는 것보다는 '옛 보신각종', '새
보신각종'으로 부르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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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 유물이 어우러진 석조물 정원

종각에서 내려와 기개 넘치는 금강송이 늘어선 오솔길을 지나면 석조물 정원이 펼쳐진다.

이곳에는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불상과 석탑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소나무부터 대나무, 참나무, 산사나무, 배롱나무, 매화나무, 수양벚나무에 이르기까지 수백종의 나무와 꽃들이 철마다 자태를 뽐낸다.

대나무 산책길 한쪽에 마련된 작은 서가에서는 벤치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책을 꺼내 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박물관에 왔으니 풍경에만 취하지 말고 정원의 주인공인 석탑을 찬찬히 둘러보자.
완벽한 비례를 뽐내는 통일신라 석탑과 개성 넘치는 고려 석탑을 한 자리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7층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남계원 칠층석탑(국보 제100호)은 정원에서 가장 우람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탑이다.

날렵하고 경쾌하게 말아 올린 추녀가 묵직한 조형감각과 대비되면서 고려 석탑 특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는 3층이나 5층 석탑이 전형이었지만, 고려 시대에 들어서면서 다층 석탑이 유행해 7층에서 9, 10층까지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칠층석탑 맞은편에 쌍을 이룬 두 개의 삼층 석탑은 통일신라 시대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김천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99호)이다.

상단 일부가 훼손되긴 했지만, 비슷한 시기 제작된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처럼 완벽한 황금 비율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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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항사 삼층 석탑을 지나면 또 한 쌍의 석탑이 나온다.

3층으로 쌓아 올려 불탑처럼 보이지만 안내석을 보니 고려 시대 고승인 나옹화상의 사리를 모신 보제존자 사리탑이라고 쓰여 있다.

불탑 형태의 승탑은 고려 말 높아진 승려의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층 형태의 일반적인 승탑과 달리 불탑 형태로 승탑을 건립해 고승을 부처 격으로 높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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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존자 사리탑을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니 진달래와 철쭉이 어우러진 개울이 나왔다.

숲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소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연못에 폭포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미르 폭포라는 이름의 이 폭포와 개울은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다.

미르는 용을 뜻하는 옛말로 박물관이 위치한 용산이라는 지명에서 따왔다.

폭포 위로 유난히 솟아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마치 못에서 승천하는 용처럼 보였다.

껍질이 검은빛을 띠는 이 소나무는 주로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송(곰솔)이라고 한다.

[박물관 탐방]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정원에 숨겨진 보물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