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미술가 이건용 씨가 1976년 선보인 행위예술 '신체드로잉 76-2'
전위미술가 이건용 씨가 1976년 선보인 행위예술 '신체드로잉 76-2'
1975년 서울 충무로 백록화랑. 그는 쪼그리고 앉아서 분필로 사각 형태의 선을 그으며 발바닥으로 조금씩 앞으로 움직여 나갔다. 삐죽삐죽 그려진 사각형 위에 미리 준비한 하얀 종이를 깔았다. 느닷없이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흩뿌린 뒤 한참 뒤 종이 조각들을 빗자루로 쓸어 모아 작은 형태의 사각형 모형을 만든 뒤 일어나서 “끝났다”고 말했다. 면적(대상)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바뀔 수 있다는 상황을 몸으로 연출한 그는 이 작품 제목을 ‘동일면적’으로 붙였다. 이 작품은 1970년대 한국사회에서 ‘불온미술’로 간주하던 행위미술의 ‘물꼬’를 터 준 계기가 됐다.

갤러리현대서 개인전 여는 한국 1세대 전위미술가 이건용
한국 1세대 전위미술가 이건용 씨(74·사진)의 시선은 이처럼 전위적이고 실험적이었다.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술대를 졸업한 그는 1969년 결성돼 현대미술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실제 작품을 긴밀히 연결하고자 한 ‘공간과 시간’(ST)을 이끌었다. ‘아방가르드 그룹’(AG)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신체항’을 발표해 국제 화단에서 호평을 받았다. 1975년 ‘동일면적’을 시작으로 5년간 40편이 넘는 작품을 내놓으며 1970년대라는 한국 상황의 암울함을 행위예술로 승화하려는 그의 외로운 분발은 놀라웠다.

30일 개막해 10월16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리는 ‘이건용, 이벤트-로지컬’전은 이런 이씨의 정신을 오랜만에 돌아볼 수 있는 자리다. 영상, 회화, 설치, 행위예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 그는 연필을 비롯해 크레용, 합판, 종이 등 하찮은 매체를 활용해 행위예술에서 신체의 한계를 확장하고 시각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씨는 1970년대 신체를 활용해 특유의 간명한 행위와 군더더기 없는 논리적 사건의 전개로 국제 미술계에서도 손색이 없는 행위미술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의 ‘신체드로잉’ 시리즈는 “왜 화면을 마주 보면서 그려야만 하는가”에 의문을 제기한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의 키(175㎝)와 비슷한 높이의 합판 뒤에서 손이 닿는 만큼 선을 긋거나, 캔버스를 옆에 두고 팔을 앞뒤로 둥글게 뻗어 선을 긋는 등의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동그란 원을 그리고 “여기, 저기, 거기”를 외친 작품도 신체와 장소, 관계 등에 대한 독창적인 미학과 논리로 접근한 퍼포먼스 작업이다. 신체와의 소통이 이 예술가가 현실에서 이루려고 한 주제다.

인간의 신체를 생각하며 ‘인생은 짧고, 예술도 짧다’는 사실을 인식한 그는 “신체 작업은 자신을 표현하고 1970년대 정치·사회적 한계를 느낀 우리 입장과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행위예술로 삶과 예술적 실천이 분리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고, 한국 사회의 비논리적인 상황과 행동들에 대한 ‘처방’을 추구했다.

40여년 후 그는 다시 힘주어 말한다. “예술의 매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다. 작가의 몸은 ‘예술을 통한 소통’에서 가장 탁월하고 직접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 의식이 과잉되고 조작적인 방법으로 조정되는 현대 사회를 행위미술로 꼬집고 싶다.”

작가는 30일 오후 6시와 10월16일 오후 4시 전시장에서 1970년대 퍼포먼스 ‘동일면적’ ‘건빵 먹기’ ‘장소의 논리’ ‘달팽이 걸음’ 등 대표작을 선별해 직접 재연할 예정이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