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리고자 하는 산봉우리나 산천초목,기암괴석과 골짜기는 눈에 보이는 자연이 아니라 누구나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흉중구학(胸中邱壑)'입니다. 현대적인 산수화의 형식을 통해 숲이나 나무보다는 자연의 정신을 그리려고 노력합니다. "

한국화의 현대화를 꾸준히 모색해온 인기 작가 석철주씨(59 · 추계예술대교수)의 '사의적(寫意的)산수화'론이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화랑에서 개인전(8월20일까지)을 갖고 있는 석씨는 "마음 속에 들어 앉은 자연은 서양화와 한국화,산수와 풍경,그리고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며 "그림은 형상을 가슴으로 끌여들어 감동을 만드는 작업인 만큼 욕심을 버려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말했다.

석씨는 16세에 부친의 권유로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년)의 문하에 들어가 전통산수화를 익힌 지 올해로 벌써 43년이 흘렀다. 청전으로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20세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첫 입선하고 이후에도 크고 작은 상을 받는 등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85년 탈춤의 동적인 장면을 담은 첫 개인전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은 그는 1990년 '옹기그림'시리즈,1995년 '규방'시리즈로 변신을 시도했고 1999년부터는 자연 이미지를 담은 '생활일기''자연의 기억''매화초옥도' 등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인 조형성의 병립으로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고 있다.

"요즘처럼 붓질이 신나고 재미있었던 적도 없었어요. 활황일 때는 정신 없이 작품을 만들었는데,이제는 차분히 작품을 연구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세계 미술시장이 움츠러들고 있는 만큼 더 멀리 뛰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하고,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학교 수업을 빼고는 경기도 장흥 아틀리에에 파묻혀 삽니다. "

그는 "미술시장이 침체일수록 정열적이고 진지하게 작업한다"며 "이미지 홍수시대에 오히려 기본으로 돌아가 색,면,빛,선에 충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석씨는 흰색이나 검은색의 바탕색을 칠한 후 그 위에 바탕색과 반대되는 색을 덧칠한다. 이 덧칠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맹물에 적신 붓으로 대상을 그리고 그리기가 끝나면 재빨리 마른 붓으로 여러 번 붓질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른바 '맹물 붓질'의 미학이다.

"맹물 붓질은 제가 의도한 것이지만 붓질의 스며듦으로 인해 화면에는 우연의 효과가 발생합니다. 붓질의 속도와 힘의 조절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의 화면이 만들어지거든요. 이러한 우연을 통한 자연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고요. "

그의 작품은 서양화의 '덧칠'과 한국화의 '스밈''여백'을 조화롭게 혼용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양화 재료인 아크릴로 덧칠을 하고 맹물 붓질로 한국화의 '일획성'을 견지함으로써 된장처럼 안에서 우러나오는 은은한 맛을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이번 전시에는 2006년부터 경기도 장흥 아틀리에에서 그린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를 비롯해 강희언의 '인왕산도',안견의 '몽유도원도',조희룡의 '매화서옥도' 등 대가들의 작품을 현대적인 화풍으로 재해석한 3~9m 짜리 대작과 '자연의 기억'시리즈,'달항아리','청화백자' 시리즈 등 50여점이 걸린다. (02)720-152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