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밝음, 차가움과 따스함, 죽음과 삶, 절망과 희망…. 화가 정현숙(대진대 미술학부 교수)씨는 상반된 이미지를 수 차례 화면에 겹쳐 자연의 순환과 삶의 윤회원리를 설명하려 한다. 사각 화면에 들어 있는 어슷비슷한 크기의 원형은 이런 철학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정씨는 24일부터 10월 3일까지 서울 청담동 박영덕화랑에서 열 번째 개인전을 열어 그동안 추구해온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최근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한 황금빛 아크릴릭 원형작업이 중심이지만 직선의 교차로 변화를 꾀한 흔적도 일부 발견된다. 출품작은 '전과 후(Before and After)' 시리즈. 원래 들꽃을 그렸던 정씨는 1990년대 들어 원형의 번짐 효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링거병에 묽은 아크릴릭 물감을 넣은 다음 이를 캔버스에 떨어뜨린 것. 천에 닿은 물감 방울은 자신을 원형으로 해체하며 팽창을 거듭해 은근한 자취를 화면에 남겼다. 정씨가 근래에 매료된 원형 작업은 이를 좀더 발전시킨 것이다. 무명천 상태의 캔버스에 검은 색이나 진푸른 색의 물감을 칠한 다음 금빛 혹은 은빛의 아크릴 물감을 붓끝으로 낙하시킨다. 과거의 작업이 자연스런 번짐에 충실했다면 요즘은 번진 원형에 인위적 붓질을 추가함으로써 윤곽이 분명한 동그라미를 얻어낸다. 여기에 색을 다시 덮고 원형을 그려넣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 이전의 동그라미들이 색채 밑에 숨기도 하고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고고한 화면을 연출한다. 정씨는 이런 작업을 타시즘(Tashismeㆍ얼룩화)이라고 설명했다. 작가가 이미지를 직접 그려내는 게 아니라 먼저 안료의 번짐에 의존한 다음 여기에 적절한 간섭을 추가하면 동양화의 먹이 빚어내는 번짐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재료는 비록 서양화의 그것이지만 기법과 효과는 사뭇 동양적이다. 미니멀 회화처럼 보이면서도 동양적 서정이 가득 배어 나옴은 이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빛과어둠, 삶과 죽음 등이 교차하면서 상호순환ㆍ윤회를 나타낸 것이다. 정씨는 최근 국제아트페어에 잇따라 작품을 내며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오는 10월 초에 개최되는 호주 멜버른아트페어와 10월 30일 시작하는 독일 쾰른아트페어에도 출품할 예정. 그는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수학했다. ☎544-8481-2.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