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일남(68)씨의 소설집 ''아주 느린 시간''(문학동네)이 출간됐다.

표제작 이외에 ''고도는 못 오신다네'' 등 8편이 수록됐다.

1932년 전주 태생인 최씨는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53년 등단,소설집 ''서울 사람들''''누님의 겨울'' 등을 상재했다.

마지막 활자세대를 자처하는 최씨는 아직도 원고지와 만년필을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번 사용한 단어는 절대 같은 작품에 다시 등장시키지 않을 만큼 언어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우리시대 각설이(장타령꾼)로 이문구 박상륭 최일남씨를 꼽으며 "이야기로의 후퇴를 소설의 전략으로 삼은 최씨는 근대소설이라는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라고 했다.

3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창작집에선 천천히 노년의 시간을 저작하는 작가의 원숙한 손길이 느껴진다.

최씨 스스로 ''노을지경''이라고 명명한 작품집에는 죽음을 애증어린 친구처럼 끼고 사는 노년의 삶이 때론 쓸쓸하게,때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작가는 직필의 문장가답게 현실을 날카롭게 묘파한다.

표제작 ''아주 느린 시간''은 시신을 태우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목관을 지관(紙棺)으로 바꾸는 시대를 사는 다섯 노인의 독백을 담고 있다.

작가는 시치미 뚝 떼고 이들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목관화장은 두시간,지관은 삼십분이래요" "지관이라면?" "골판지로 만든 거래.기왕 태워없앨 것,나무면 어떻고 종이면 어때.기다리는 지루함을 덜기 위해서도 빠를수록 좋지" "병원에 누웠다가 해부학 교실로 직행하는 사람도 있습디다.빠르기로 따지면 그게 제일이겠네"

노인들이 납골당을 화제삼아 찧고 까부는 것은 ''언젠가 찾아올 사멸에 적응하기 위해 연습용 가사(假死) 체험을 입에나마 미리 품고 살자는 겨냥''이란다.

단편 ''고도는 못오신다네''에서 거드름 피우는 동창생을 멀리하고 당당히 자기 길을 나서는 두 노인은 ''죽어도 곁불은 안쬐겠다는 오기가 믿음직스러운''사람들이다.

작가는 ''강퍅한 부정과는 다른 비판''으로 독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시인 이문재씨는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가 장악한 이 썩지 않는 시대에 최씨의 옹기같은 글은 느림과 더불어 늙음과 죽음이 가까운 미래에 키워드가 될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고 평했다.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