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누보로망의 대표작가 알랭 로브 그리예(75)가 대산문화재단과
주한 프랑스대사관 공동 초청으로 내한, 13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78년 한차례 방한했던 그는 "20년전에 비해 훨씬 생동감 넘치는 서울의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그때 부산항에 도착해 나의 "분신"을 발견했던
기억을 최근에 썼다"고 운을 뗐다.

흰 구레나룻에 짙은 브라운색 재킷과 자주색 조끼차림으로 회견장에
들어선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들도 "분신"얘기를
썼지만, 일상속에서 현재의 나와 일치하지 않는 "또다른 나"를 자주
만난다"고 말했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그는 "내가 만든 영화에도 두 자아가 있는데 이같은
현상은 랭보의 시 "나는 타인이다"라는 구절로 요약될수 있다"고 덧붙였다.

"소설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평론가들이 치켜세워준 "누보로망"이란
용어는 사실 카뮈와 플로베르 등이 이뤄놓은 전통위에서 뻗어 나온
것입니다.

우리네 삶은 사실주의처럼 그렇게 간단히 도식화되거나 설명되는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갖고 있죠"

그는 "나이가 들수록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며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요소들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현실에서는
등장인물의 성격도 고정되지 않고 해체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누보로망식 글쓰기란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가 만들어 놓은
상황과 정형화된 인물을 그저 따라 읽지만 말고 무수한 돌발상황이나
변덕스런 의지에 대해 적극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깨우치도록
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오후 5시 이화여대에서 첫 문학강연회를 가진데 이어 서울대
(14일) 한국외국어대 (15일) 교보문고 (16일) 주한프랑스문화원 (17일)
에서도 강연한다.

14,16일에는 한국문인들과 만나고, 17일에는 로브 그리예영화제에
참가해 4편의 영화를 보고 관객과 얘기한뒤 21일 대만으로 떠난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