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8) 1983년 공동전산화시스템 가동

1896년 일제강점기 때부터
반세기 넘게 격탁매매로 거래
수작업 허점 노린 비리 횡행
1978년 '박황 사건'이 대표적

국내 상장회사 급증하며
증권시장 전산화 요구 거세
전자시세게시판 이어
자동매매체결시스템 완성

HTS·MTS로 거래방식 진화
주문실수로 인한 손실 등 새로운 위험요소 되기도
1971년 명동 증권거래소 당시 말굽형 포스트에서 이뤄진 주식 매매 장면.   /한국거래소 제공

1971년 명동 증권거래소 당시 말굽형 포스트에서 이뤄진 주식 매매 장면. /한국거래소 제공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1977년 말 늦은 밤 서울 명동. 박황 대신증권 영업부장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주식투자 손실로 불어난 개인 빚 1억원(현재가치 약 7억원)을 해결하려 횡령마저 서슴지 않았던 지난 2년. 고객 위탁금을 빼돌려 운용한 12개 가명(假名) 증권계좌는 모두 ‘깡통’으로 변해 있었다.

나중에 채워 넣을 요량으로 감행한 회사 소유 주식의 ‘공매도(空賣渡)’는 뜻밖의 주가지수 폭등으로 그를 더욱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설상가상으로 회사는 업계 최초로 업무 전산화를 위한 전사적 자산 실사에 들어가 서서히 숨통을 조여왔다. 다음날 박 부장의 책상에선 감사팀에서 걸려온 전화가 하루 종일 시끄럽게 울어댔다.

1978년 1월21일 대신증권은 증권감독원에 대규모 창구 사고를 보고했다. 피해 고객 100여 명, 피해 금액은 회사 자본금(50억원)의 절반에 가까운 24억원으로 국내 증권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양재봉 대신증권 창업자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장 취임 4개월 만에 사임을 발표했다. 주식 위탁매매 점유율 2위를 달리던 대신증권은 피해 보상과 1개월 영업정지 처분 등의 여파로 이후 수년간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려야 했다.

1970년대 주식의 대중화 물결 속에서 발생한 이른바 ‘박황 사건’은 수작업에 의존한 증권사 통제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든 금융 범죄의 종합판이었다. 직원 한 명의 일탈이 회사의 운명을 뒤흔들 수 있다는 공포는 증권산업 전체에 경종을 울렸고, 1970년대 말 공동전산화시스템 개발 작업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반세기 수작업 시대

“딱. 딱. 딱. 한전 1230원!”

1970년대 중반까지 증권거래소(한국거래소) 입회장에서 주식 거래 시작과 체결을 알리는 도구였던 ‘딱딱이’.  /한국거래소 제공

1970년대 중반까지 증권거래소(한국거래소) 입회장에서 주식 거래 시작과 체결을 알리는 도구였던 ‘딱딱이’. /한국거래소 제공

국내 주식 거래는 1970년대 중반까지 ‘집단경쟁매매’ 방식이 주류였다. 벽돌 모양의 나무토막 ‘딱딱이’를 탁자에 내리쳐 격탁매매(擊柝賣買)로도 불렀다.

당시 증권시장은 넓은 강당(입회장)에 많게는 100명 넘는 증권사 대리인이 모여 주문을 쏟아냈다. 고함을 치거나 두 손을 번? 쳐들어 ‘손질(손가락으로 희망가격을 표시)’로 호가를 표시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거래소 시장담당 직원이 순간적으로 가격과 물량의 합치점을 찾아 딱딱이를 치면 집단매매가 이뤄졌다. 거래 종목이 적을 때 효과적인 이 방식은 일제강점기였던 1896년 인천 미두(米豆) 취인소(거래소) 때부터 반세기 넘게 증권시장의 풍경을 대변했다.

현대식 개별경쟁매매(포스트매매)가 등장한 것은 1971년이다. 컴퓨터가 없던 시기 입회장 곳곳에 있는 포스트(단상)에 주문표를 써내면 거래소 직원이 일치하는 주문을 찾아 맺어줬다. 개별경쟁매매는 다양한 종류의 주문을 시시각각 소화할 수 있어 1975년부터 격탁매매를 완전히 대체했다.

시세 표시는 입회장 벽면에 분필로 쓰거나 숫자 자석을 사용했다. 입회장 밖 증권사 직원들은 거래소에 설치한 수십 대의 전화기에 들러붙어 시시각각 시세 변화를 회사에 전달했다. 지점에서 주문을 낸 고객이 주식 체결 소식을 전해 들으려면 30분 넘게 기다려야 하는 게 예사였다. 전국 각지의 영업점들은 대한증권업협회(금융투자협회) 방송요원이 거래소 방송실에서 전하는 음성 유선방송에 귀 기울이며 수십 분 늦은 시세를 칠판에 받아적었다.

오랜 수작업 거래와 시세표시 방식은 1970년대 중반 국내 상장회사가 급증하면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래소 직원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고 주문 ‘배달’ 사고도 급증했다. 1980년엔 한 해 창구 사고로 문책을 받은 증권사 직원이 23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1979년 한국증권전산(코스콤) 직원들이 여의도 증권거래소 전자시세게시판을 테스트하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코스콤 제공

1979년 한국증권전산(코스콤) 직원들이 여의도 증권거래소 전자시세게시판을 테스트하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코스콤 제공

다급해진 거래소는 재무부와 협의해 1977년 한국증권전산(코스콤)을 설립하고 증권시장의 전산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당시 직원 6명, 기술인력 1명으로 출범한 증권전산은 거래소를 대리해 모든 작업을 손으로 처리하던 증권산업을 10여 년에 걸쳐 ‘완전 전산화’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공동온라인시스템의 등장

“인감이랑 통장 맡길 테니 보관증만 떼주세요.”

1970~1980년대 증권시장에 미숙했던 고객들은 창구 직원과 절대적인 신뢰관계를 맺는 경우가 흔했다. 직원 명함만 받고 뭉칫돈과 도장을 맡기기도 했다. ‘직원 자기계산으로 투자(일임매매)’를 요청하고 큰 수익을 기대하는 투자자도 많았다.

일임매매로 자산을 축낸 직원은 때때로 다른 위탁자의 재산을 도용(주식 부정배분)하거나 횡령했고, 새로 발급한 수기(手記) 증권통장이나 보관증을 회사의 원장(元帳)엔 기록하지 않는 수법도 썼다. 고객 자산 5억원을 굴리는 ‘스타’ 증권맨이었던 박황 사건도 이 같은 허점을 악용한 범죄였다.

증권전산은 일본 노무라증권 사례 등을 참조해 1983년 ‘주문전달’과 ‘고객계좌’ 업무를 전산화한 공동시스템을 개발했다. ‘증권공동온라인시스템(SOT: stock order turnaround system)’으로 불린 이 시스템은 창구 직원이 전화 대신 전산으로 매매주문을 내고 업계가 해당 정보를 공유하도록 했다.

디지털 정보 저장을 통해 기존의 수기 통장도 증권카드(ID카드)로 대체했다. 오늘날 은행 카드처럼 지급결제 기능까지 붙은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카드’의 효시였다. SOT는 위탁증거금 등을 조회해 매매주문의 적합성도 판단할 수 있어 주문 사고 감소에 크게 기여했다. 전산화 이전 영업점에선 고객의 구두 약속만 믿고 위탁증거금을 대납하는 등 외상 거래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SOT 가동과 더불어 매년 수십 건에 달했던 창구 사고는 1980년대 후반부터 연간 5건 이하로 뚝 떨어졌다.

주식거래의 완전한 전산화는 1988년 ‘주식자동매매체결시스템(SMAT)’ 가동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전까지 거래소로 출근하던 증권사 대리인들은 영업점에서 SOT로 낸 주문을 거래소 단말기에서 확인한 뒤 입회장 포스트로 이동해 주문표를 적어냈다. SMAT는 이 과정을 모두 전산으로 연결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실시간으로 주식을 매매하는 시대를 열었다. 한때 2119㎡ 규모의 입회장을 가득 메웠던 증권사 시장부 인력(시장대리인) 대다수는 이때부터 전보 인사발령을 기다려야 했다.

◆실시간 시장정보 제공

증권전산이 SOT와 별개로 개발한 ‘전자시세게시판’은 거래소와 증권사 영업장 풍경의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1979년 7월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입회장에서 처음 선보인 시세게시판은 같은 해 9월 대신증권을 시작으로 주요 증권사 영업장으로 퍼져나갔고, 벽면의 대형 칠판은 자재창고로 밀려났다.

1980년 국산 단말기(PHOENIX-1)로 가동한 최초의 증권정보문의시스템. /코스콤 제공

1980년 국산 단말기(PHOENIX-1)로 가동한 최초의 증권정보문의시스템. /코스콤 제공

증권정보 조회 서비스도 정보기술(IT) 발전과 더불어 획기적인 변화를 거듭했다. 증권전산이 1980년 가동한 ‘정보문의시스템’은 실시간 시세와 기업정보를 조회할 수 있는 획기적인 서비스로 현대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의 원조였다. 이 서비스는 1995년 기관투자가 전용 종합금융정보단말기인 ‘체크(CHECK)’로 발전한다. TV에서 증권사 트레이딩룸을 비출 때 등장하는 그 단말기다.

개인투자자들이 집에서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HTS는 1990년대 중반 하이텔과 천리안 등 모뎀을 이용한 PC통신 서비스의 대중화 결과물이었다. 1993년부터 SOT를 자체 시스템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증권사들은 1997년 금융당국의 서비스 허용과 동시에 다양한 기능을 갖춘 HTS를 쏟아냈다.

인터넷을 이용한 HTS 주식거래는 저렴한 수수료와 손쉬운 조작 매력에 힘입어 일반 가정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1999년 국내 최초의 온라인증권사 이트레이드증권중개(현 이베스트투자증권)와 이미래에셋증권(미래에셋대우), 2000년엔 키움닷컴증권(키움증권)이 탄생한 배경이었다. 2017년 ‘수수료 평생 제로’ 서비스가 등장할 때까지 이어져 내려온 위탁매매 수수료 인하 ‘치킨게임’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새로운 변화

주식거래 전산화의 완성은 영업점 직원의 악의적인 일탈을 상당 부분 기술적으로 차단했지만 시스템 오류와 과부하, 트레이더의 ‘주문실수(fat finger)’ 같은 새로운 위험을 낳기도 했다. 2013년 한맥투자증권은 직원의 주문실수로 460억원의 손실을 내고 2015년 파산했다. 삼성증권은 올해 112조원의 천문학적인 우리사주 배당사고를 내 증권시장을 뒤흔들기도 했다.

수십 년간 환희와 눈물이 교차했던 옛 증권시장 풍경도 빠르게 사라져갔다. 거래소는 1997년 여의도 거래소 입회장의 상징이었던 육각형 포스트 이용을 중단했다. 옛 입회장은 현재 행사와 역사홍보, 교육 목적의 KRX금융교육종합홍보관(KRX스퀘어)으로 사용하고 있다. 연말 거래소 폐장 행사 때 주문표를 바닥에 뿌리며 환호하던 증권맨들도 1996년을 끝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지금은 홍보관에서 색종이를 뿌리는 방식으로 과거를 추억하고 있다.

최근 스마트폰의 대중화에 따른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의 성장은 칠판을 대체하며 수십 년 전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전자시세게시판까지 골동품으로 바꿔놨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여의도 대신증권의 시세게시판은 2016년 회사가 명동으로 되돌아가면서 37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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