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 속 `득'보다 `실'이 더 많아

원.달러 환율이 석 달만에 다시 1천500원선까지 치솟자 가뜩이나 경기 불황으로 고전하는 기업들의 근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원론적으로 다른 통화 대비 원화 환율이 올라가면, 즉 원화 가치가 낮아지면 부품 등의 수입 비중이 큰 업체에 불리하지만 수출 기업 입장에서는 가격 경쟁력 등의 측면에서 '호재'가 된다.

그러나 최근처럼 글로벌 실물 경제 침체로 수요 자체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는 환율 상승의 '득' 보다 '실'이 더 많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 항공.에너지.식품 등 '직격탄'

지난해 환차손으로 적자를 기록한 항공업계는 연초 예상과 달리 환율이 급등하자 표정이 다시 굳어지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올해 경영 목표를 세우며 연간 평균 환율을 1천200원으로 가정했다.

그러나 이미 환율은 예상치를 25%나 웃도는 수준이다.

한 항공사 관계자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며 "환율이 계속 오르면 유가 하락에 따른 상쇄 효과까지 모두 사라질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막대한 유류를 수입하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환율이 10원 오를 때 각각 200억원, 78억원 가량 손해를 본다.

정유업계도 비상이다.

원유를 도입하고 2~3달 후 결제 시점까지 오른 환율만큼 고스란히 손실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어렵게 수출로 얻은 이익의 대부분을 환차손으로 까먹은 아픈 기억도 있다.

예를 들어 SK에너지의 경우 원.달러 환율이 1원 오르면 30억원 가까운 환차손이 발생한다.

현재 SK에너지는 환 관리 협의회와 산하 실무위원회를 두고 국제 금융시장 동향에 따라 환 운용 전략을 수립, 시행하고 있다.

다만, 작년부터 계속된 유가 하락추세가 그나마 환율 변동 충격을 줄이는 '완충' 역할을 하고 있다.

원자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식품업계 역시 가파른 환율 상승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식품업계는 통상 원.달러 환율이 100원 정도 오르면 1천억원의 손실을 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올해 경영계획상 연평균 환율 수준을 현재 환율보다 300원이나 낮은 1천200원으로 설정했다.

연평균 예상 환율과 한 시점의 환율을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단순 계산상으로는 경영계획보다 3천억원 정도 손실이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예년의 경우 1~2월은 설 명절 덕분에 수입을 확보한 상태에서 한 해를 출발했지만, 올해의 경우 연초부터 대규모 손실을 안아 무더기 적자가 예상된다"며 "환 헤지(위험분산)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원료나 완제품을 수입하는 제약업계도 걱정이다.

대웅제약은 환율이 1% 오르면 원가가 0.2% 늘어나고, 신약 비중이 높은 보령제약이나 수액 주사제 생산이 많은 중외제약 관계사들도 환율에 매우 민감하다.

◇ 수출기업도 "환율효과, 글쎄.."

수출 비중이 큰 전자업계의 경우 일반적으로 환율이 오르면 유리한 측면이 많다.

해외시장에서 LCD.반도체 등 주요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일본 등 경쟁국 업체에 비해 커질 뿐 아니라 원화로 환산한 수출 이익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의 경우, 세계 경기 침체로 글로벌 수요 자체가 크게 위축된데다 외환시장의 변동성도 커 뚜렷한 환율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예전에는 '원달러 환율이 100원 오르면 영업이익이 9천억원 늘어난다'는 식의 추정이 가능했지만, 요즘은 세계적으로 외환.금융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다 실물경기도 나빠 유.불리를 따지기 매우 어려운 시점"이라고 말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도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달러 기준으로는 작년 11월~올해 1월 10~20% 가량 매출이 줄었는데, 원화 기준으로는 오히려 늘어나는 '착시현상'이 있다"며 "환율이 다른 경쟁국에 비해 좋아 위기를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것(환율)이 언제 독약으로 돌아올지 폭탄을 들고 있는 기분"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

아울러 비중은 많이 줄었지만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쓰는 부품이 여전히 많아 엔화 강세에 따른 수입 비용 증가도 걱정거리고, 원화환산 외화차입금이 늘어나 재무상 손실 규모가 늘어나는 것도 전자업계로서는 부담이다.

삼성전자가 따로 올해 환율 전망치를 공개한 적은 없지만, 같은 그룹 계열인 삼성경제연구소는 올해 연평균 원달러 환율과 상반기 환율을 각각 1천216원, 1천400원 안팎으로 보고 있다.

LG전자의 경우 올해 환율을 평균 약 1천100원선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동차나 철강업계도 수출만 생각하고 환율 고공행진을 마냥 반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환율이 상승하면 원화 환산 매출은 늘겠지만, 지나치게 오르면 그만큼 수입 원자재 가격도 뛰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의 경우 현재 환율이 올해 예상치 1천~1천200원보다 300원이상 높아지자 매출 증가를 기대하고 있다.

환율이 10원 상승하면 현대차와 기아차를 합쳐 매출이 2천억원 가량 늘어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현대.기아차그룹 관계자는 "환율과 함께 원자재 가격이 올라 비용이 늘어나면 차 값을 올릴 수 밖에 없고, 이 경우 글로벌 수요 급감 속에서 판매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는만큼 환율 변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철강업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원자재 수입 가격의 탄력성이 수출 철강 제품 가격 탄력성보다 낮아 환율이 뛰면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