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칸영화제 `무관(無冠)의 한'을 풀어준 「취화선(醉畵仙)」은 조선시대 말 천재화가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일대기를 담은 작품이다. 2년 전 「춘향뎐」에서 정일성 촬영감독과 손잡고 판소리 가락을 화면에 풀어내는 모험을 감행했던 임권택 감독은 이번에도 그와 함께 한국화의 필치를 동영상으로옮기는 실험을 시도했다. 장승업은 오원(吾園)이란 아호에서부터 호기가 느껴진다. 1세기 가량 앞선 조선최고의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와 혜원(蕙園) 신윤복처럼 나도[吾] 원(園)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술과 여자를 즐기고 감히 어명을 어긴 채 궁궐을 뛰쳐나왔던 기행까지더하면 주인공 감으로 제격이었고 자유인 기질의 임권택 감독과 배짱이 맞는 상대였다. 첫 장면은 오원이 술잔을 연신 입으로 가져가며 여러 사람 앞에 그림을 그리는것으로 시작되고 곧바로 회상 장면으로 이어진다. 청계천 거지소굴 근처에서 죽도록 맞고 있던 소년 오원(최민식)은 개화파 선비김병문(안성기)의 손에 거두어진 뒤 그의 소개로 역관(譯官) 이응헌의 집에 의탁한다. 그곳에서 중국 그림들을 한번 보면 그대로 모사하는 솜씨를 발휘하자 금세 이름이 알려져 화가 혜산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할 기회를 얻는다. 세도깨나 부리는 사대부치고 오원의 그림 한점 소장하지 않은 집 없을 정도가되자 그는 궁궐로 불려가 어명에 따라 그림을 그리게 되나 타고난 기인 기질을 이기지 못한 채 붓을 내팽개치고 뛰쳐나온다. 화조(花鳥)나 산수(山水)나 인물(人物) 할 것 없이 두루 빼어난 재주를 갖추고있었지만 그를 괴롭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남과 다른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는 숱한 그림을 그렸다가 불에 태우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 홀연히 종적을 감춘다. 구도 행각을 연상케 하는 오원의 그림 인생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여인들의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는 이응헌의 집에서 소운(손예진)을 만나 첫사랑을 느끼고 기생 출신의 진홍(김여진)과 동거하는가 하면 천주교 박해로 몰락한 양반 출신 기생매향(유호정)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여기에 병인박해(1866년), 갑신정변(1884년), 동학농민운동(1894년) 등 격동의역사도 오원의 인생과 그림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설명돼 있다. 「취화선」의 가장 큰 매력은 빼어난 영상미에 있다. 하늘을 새까맣게 수놓는되새떼, 황금 물결 넘실거리는 억새밭, 끝없이 펼쳐진 들판, 눈발 날리는 개펄 등과타임머신을 탄 듯 완벽하게 재현된 19세기 서울 거리 오픈세트는 관객들로 하여금스크린에서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 날렵한 붓놀림에 따라 하얀 화선지에 하나둘씩 선과 점이 채워지면서 우아한 한국화가 완성되는 장면을 솜씨있게 카메라로 포착한 것도 미술관에서는 맛볼 수 없는즐거움이다. 지난 10일 개봉해 26일까지 17일간 전국에서 48만명 가량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