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1대 임금 중종(中宗)에게는 후궁이 9명 있었다. 이중에서도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 및 창빈 안씨가 요주의 인물이다. 때문에 SBS 월-화 드라마 '여인천하'가 중종의 정비인 문정왕후, 정난정이라는 요부(妖婦)와 함께 이들 후궁 3명을 드라마 주축인물로 설정한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절대 비호 아래 정권을 농단한 윤원형이라는 인물이 실제는 문정왕후의 동생임에도 오라비로 설정된 것처럼 역사에 기록된 이 후궁들과 드라마의 후궁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국민대 국사학과 지두환 교수가 최근 펴낸 「중종대왕과 친인척」(역사문화) 시리즈중에서도 후궁에 대해 전체를 할애한 마지막 제3권은 드라마와 기록의 괴리를 판별할 수 있는 준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볼 때 드라마가 실상을 가장 왜곡한 후궁은 창빈 안씨이다. 조선왕조에서 중전은 지존(至尊)이기 때문에 직급이 없으나 그 아래 후궁은 달랐다. 이들은 각기 직급에 따른 차별이 있었다. 빈(嬪)은 후궁중에서도 직급이 가장높아 영의정.좌의정.우의정과 같은 정1품 대접을 받았다. 따라서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정1품인 경빈 박씨가 같은 직급인 정승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식으로 마치 하인을 부리듯 설정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역사 왜곡일 수 있다. 중종의 경우 빈은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 두 명뿐이었다. 나머지 후궁은 숙룡(淑龍.종3품)이니 숙원(淑媛.종4품)이니 상궁(尙宮.정5품)이니 해서 직급이 낮았다. 한데 '여인천하'를 보면 안씨(安氏)라는 성을 지닌 후궁이 창빈이라고 해서 정1품 빈으로 나온다. 안씨는 중종 13년(1518년) 후궁이 된 다음 상궁과 숙원을 거쳐 숙룡으로 죽으니 이 때가 명종 4년(1549)이었다. 따라서 중종이 살아 있을 때 안씨를 경빈 박씨나 희빈 홍씨처럼 정1품 빈으로 설정한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한참 멀다. 하지만 안씨는 결국 빈이 되는데 이는 죽고 난 다음인 선조 10년(1577)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안씨를 빈으로 올린 이는 선조였다. 그의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족보로 따질 때 도저히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할머니 안씨가 중종의 정비는 고사하고 빈(嬪)보다도 한참 아래인 종3품 후궁이었던 데다 그 아버지 덕흥군 또한 창빈의 셋째 아들이었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도대체 왕위에는 근처도 가지 못할 인물이 왕이 된 경우는 또 있다. 강화도령 철종과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들 고종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에게서는 몇 가지 공통점이 관찰된다. 첫째, 쿠데타 같은 비상시국에 엉겹결에 왕이 됐고 둘째, 나라를 망쳤으며 셋째, 우둔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억세게 운이 좋아 죽고 난 뒤 빈으로 추봉된 창빈 안씨는 행복한 인물일지 모르나 조선, 나아가 한국사를 위해서는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중종 후궁 가운데 불행한 인물은 경빈 박씨. 경빈은 뚜렷한 배경이 없었다. 아버지 박수림은 상주 사람으로 명색만 사대부였지 몹시도 궁색한 살림을 했다. 이런 그에게 무기는 오직 하나. 빼어난 아름다움이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한때 중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아들 복성군을 낳아 중종의 두번째 부인 장경왕후가 죽었을 때는 중전이 될 뻔도 했으나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정광필의 반대에 밀려 빈으로 그대로 눌러앉아야 했다. 경빈의 비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나중에는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變)'이라 해서 쥐를 태워 죽이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동궁, 즉 세자를 저주하려 했다는 혐의를 쓰고 쫓겨났다가 결국 아들 복성군과 함께 사약을 받고 죽는다. 한데 이 작서의 변은 그 반대파가 조작한 사건이라는 흔적이 짙다. 반면 연산군을 몰아낸 공로로 정국공신 1등에 제수된 홍경주를 아버지로 둔 희빈 홍씨는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매우 철딱서니없는 여인으로 설정돼 있는데 88세라는 장수를 누리다가 선조 14년(1581)에 졸한다. 희빈 홍씨의 행적에서 특이한 점은 문정왕후 소생인 명종이 즉위하던 해에 궁궐을 떠나 사가(私家)로 나가는 대목인데 핑계는 어머니의 병환이라고 했으나 실제 이유는 그 아들 봉성군이 모반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