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재 서울대 석좌교수
이유재 서울대 석좌교수
수상한 노인(?)
한 노인이 미국과 캐나다의 크고 작은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은 지팡이와 보행기에 의존했다. 어느 날은 아주 건강하게 활동했다. 어느 날은 부랑자 모습을 했다. 이 노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녀는 당시 26세의 제품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였다. 그녀는 노인을 비롯해 모든 사람에게 편리한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관찰과 설문조사만으로 노인들의 불편함을 알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접 노인이 되어 살아 보기로 했다.

그녀는 TV 프로그램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아 80대 노인으로 분장했다. 다양한 노인의 삶을 위해 노숙자, 귀부인 등 9명의 모습으로 분장했다. 눈에는 도수가 안 맞는 안경을 썼다. 귀에는 솜을 넣었다. 철제 보조기를 이용해 걸음걸이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3년 동안 100여 개 도시를 홀로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노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깨닫게 됐다. 평소엔 10분 밖에 걸리지 않았던 곳이 노인 걸음으로는 1시간 이상 소요됐다. 버스는 노인이 타기에 너무 높았다. 보행 신호등은 노인 걸음으로 건너기에는 너무 빨리 바뀌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과 상점 문을 여닫는 것도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노인에게는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제품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는 3년간 노인의 삶을 체험했다.
제품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는 3년간 노인의 삶을 체험했다.
이렇게 노인의 삶을 체험한 덕분에 모두에게 편리한 제품을 발명할 수 있었다, 소리 나는 주전자, 출입문에 계단이 없는 저상버스, 손쉽게 감자를 손질할 수 있는 일자형 감자칼 등이다. 이 물건들은 당시 그야말로 혁신 그 자체였다. 성별, 연령, 장애 유무와 관계 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들이다.
고객처럼 생각하라
흔히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라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강조한다. 필자는 종종 ‘고생’을 하라고 말한다. 젊어서는 사서도 하라는 고생(苦生)이 아니다. ‘객처럼 각하라’는 의미다. 자기 입장이 아니라 고객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고객처럼 생각하려면 고객의 신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필자가 재미있게 본 카툰 내용을 소개한다. 한 사람이 신발을 신으려고 열심히 애쓰는데 들어가지 않아 끙끙거리고 있다. 안타깝게 지켜보던 직원이 참다못해 한 마디 던진다. “손님, 다른 신발을 신으려면 당신 신발은 벗어야 하지요.”

그렇다. 남의 신발을 신으려면 우선 내 신발을 벗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두 마리 개(犬, 견)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편견(犬)선입견(犬). 편견과 선입견이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야 온전히 남의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누구도 ‘지식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식의 저주’는 자신에게는 익숙한 것이라서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다. 한 업종에서 오래 근무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지식의 저주’에 빠지기 쉽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하는 고객도 알고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내게는 익숙한 것이 고객에게는 낯설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려면 고객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명지병원은 의료진이 환자가 되어 보는 역지사지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환자 등록부터 진료, 검사, 수납, 입원까지. 환자들이 병원에 와서 겪어야 하는 모든 과정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병원에 처음 온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IBM은 컴퓨터 판매를 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다가 수많은 추격자와의 경쟁으로 추락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회생했다. 철저하게 고객지향적인 회사로 변신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 변신의 중심에는 루 거스너 회장이 있다. 거스너 회장은 사실 오랫동안 IBM의 고객이었다. 고객의 입장에서 불편한 점을 직접 체험해 왔던 터라 고객 중심 사고를 회사내 전파하는 것이 가능했다. 과거 사업별로 분산되어 있던 체제를 고객을 중심으로 시너지를 추구하는 체제로 개편했다.
IBM은 과거 주요 고객이었던 루 거스너를 영입해 회생했다.
IBM은 과거 주요 고객이었던 루 거스너를 영입해 회생했다.
현대카드는 수년 전 고객 상담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카피라이터 출신의 직원을 채용해 고객 상담 대본을 샅샅이 분석했다. 일주일에 두 시간씩 관련 임원들이 모여 상담 대본을 읽고 녹음된 내용을 들어보는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고객 상담 대본을 전면 개편했다.

상담센터는 물론이고 현업 부서, 마케팅 등 관련 부서와 협의 체제를 구축했다. 급기야 1000여 개 대본을 고객 중심으로 바꿨다. 예를 들어 ‘피해를 보상해 드리고’라는 말을 고객 입장에서 해석해 ‘피해를 보상받으실 수 있고’로 바꿨다. ‘내사 없이’란 어려운 표현도 ‘방문 없이’로 바꿨다.

삼성전자는 고객경험(CX: Customer eXperience)에 방점을 두고 조직 개편을 했다. 예컨대 소비자가전과 IT/모바일을 통합한 완제품 부문 명칭을 디바이스경험(DX: Device eXperience)으로 변경했다. 가전, IT, 모바일은 제품이나 기업 관점의 명칭이다. 디바이스경험은 고객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LG전자도 상품기획으로 불리던 조직을 고객경험(CX)으로 바꿨다. 고객이 느끼는 불편함을 파악하기 위해 사내 인트라넷에 ‘CX 소통 플랫폼’을 만들었다. 구성원들은 여기서 고객경험 노하우를 논의하고 고객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작은 규모의 업체는 미혼 직원을 고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필자가 아는 한 교육업체는 사업 초기부터 기혼자나 자녀가 있는 직원들에 대해 오히려 우호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교육업의 특성상 기혼자가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고객과의 불협화음이 있을 때는 직원에게 본인이 당사자였다면 어떻게 했을 지 상상해 보게 한다. 직원 입장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고객의 행동이지만 부모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고객처럼 생각하라’는 말을 남의 얘기로만 여기는 사람이 종종 있다. 회사 업무가 B2B인 직원이거나 외부 고객을 직접 만날 일이 전혀 없는 개발 엔지니어 등이다. 이들은 주로 자신의 역량이나 성과를 중시한다. 그렇지만 보고서 하나를 작성하더라도 그 자료를 보는 고객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 보고서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알기 쉽게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게다가 고객이 궁금해하거나 질문할 것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모든 사회 생활에 적용될 수 있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의 처지와 기분을 배려하자.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는 그들의 불편한 점을 해결해 주자. 모름지기 내가 먼저 나서 행동하고 마음을 보여주면 상대방도 마음을 연다.

고객처럼 생각하자. 아니, 고객처럼 행동하자. 다 함께 살만한 세상을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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