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절감·전자 폐기물 감축" vs "품질 저하·안전 우려"
미국·유럽 소비자 수리권 강화 추세…국내서도 법안 발의

스마트폰 이용자가 고장 나거나 망가진 부품을 직접 사서 교체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애플은 내년 초 미국에서 셀프 수리 제도를 도입한다고 지난달 중순 발표했다.

소비자가 온라인으로 필요한 부품과 도구를 사서 교체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초기에는 아이폰12, 아이폰 13시리즈 제품의 화면, 배터리, 카메라 등이 대상이다.

내년 중에 다른 국가로 셀프 수리 제도를 확대한다는 게 애플의 계획으로, 한국 도입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다.

애플의 이번 발표를 계기로 소비자가 전자기기 등 구매 제품을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수리권'(Right to repair)이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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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자 수리권 강화하는 미국·유럽
미국과 유럽에서는 수리권을 강화하는 추세다.

제조업체의 직영 서비스센터나 공인 수리점을 통하지 않고도 소비자가 직접 제품을 고쳐 쓸 수 있게 하거나 사설 수리점도 이용할 수 있도록 부품과 장비를 공급하게 만드는 것이다.

미국의 공정거래기구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지난 7월 소기업, 소비자 등이 자신의 제품을 고치는 것을 막는 행위에 대한 법 집행을 강화하기로 했다.

리나 칸 FTC 위원장은 "수리 제한은 소비자의 비용 부담을 크게 늘리고, 혁신을 억누르고, 독립 수리점의 사업 기회를 막고, 불필요한 전자 폐기물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 정부의 이런 정책이 수리권 보장에 소극적인 애플의 태도 변화를 이끈 요인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애플의 셀프 수리 제도가 전자제품 수리 지식과 경험이 있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10월 내놓은 '미국의 전자기기 수리권 논의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미국에서 수리권 관련 법안이 올해 3월 기준 25개 이상의 주에서 발의돼 있다.

디지털 시대인 만큼 수리권 대상이 전자기기로 확대되고 있다.

보고서는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 제품 수리가 제한된 탓에 인공호흡기 등 주요 의료기기를 고치지 못해 환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학생들이 전자기기를 수리 못 해 온라인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지적되면서 수리권 확보에 대한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에서는 지난 7월부터 세탁기, TV, 냉장고 등 일부 전자제품의 예비부품을 최장 10년간 제공하도록 하는 수리권법을 시행하고 있다.

안정적인 부품 공급으로 원활하고 손쉬운 수리라 가능하게 하자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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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용 절감 등 소비자 권익 확보"…전자폐기물 감축 효과도
수리권 강화의 목적은 소비자 권익 확보와 환경 보호에 있다.

소비자가 구매한 제품을 제조업체의 서비스센터나 공인 협력업체가 아닌 일반 수리업체에서는 수리하기 어렵고, 부품을 구매할 길도 막혀 있어 비싼 수리비를 내야 한다는 불만이 많다.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 없는 부품 교체를 소비자가 직접 할 수 있으면 수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고, 부품 공급 기간이 길어지면 제품 수명도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제품 수명이 증가하면 전자 폐기물을 줄일 수 있다.

유엔대학(UNU)과 유엔훈련조사연구소(UNITAR) 등의 '글로벌 전자 폐기물 모니터 2020' 보고서를 보면 2019년 전 세계 전자 폐기물은 5천360만t으로 5년 사이에 21% 증가한 데 이어 2030년에는 7천470만t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019년 우리나라의 1인당 연간 전자 폐기물 배출량은 15.8㎏으로 세계 평균 7.3㎏의 2배가 넘었다.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의 수명을 1년 연장하면 2030년까지 매년 210만t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유럽환경국의 연구 결과도 있다.

210만t은 1년 동안 100만 대 이상의 자동차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에 해당한다.

영국 정부는 수리권법 시행으로 연간 150만t의 전자 폐기물을 줄이는 것은 물론 탄소 배출 감축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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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폰 수리권' 법안 계류…업계 "수리 품질 저하" 이유로 반대
국내에서도 전자기기 수리권 논의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소영·김경민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보고서에서 "현재 국내에서 스마트폰의 품질 보증기간은 2년(배터리는 1년), 제조업체의 부품 보유기간은 4년으로 길지 않다"며 "제조업체가 수리를 독점하는 경우 수리 비용이 커지고 수리 기간이 길어질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소비자의 수리 가능 기간을 연장하고 수리 비용을 줄이며 수리업체 선택권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전자기기 수리권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국회에는 휴대폰 수리권을 보장하는 법안이 계류돼 있다.

국회 부의장인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은 지난 9월 휴대폰 수리에 필요한 부품, 매뉴얼, 장비 등의 판매를 거절하거나 지연하는 행위, 수리를 제한하는 소프트웨어를 설치·운영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관련 업계는 반대하고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법안 검토 보고서를 보면 삼성전자는 사설업체에서 수리받을 경우 수리 품질 저하, 수리비 상승 등으로 고객 이익이 거의 없을 것이며, 비정품·모조품 사용으로 인한 부실 부품 유통, 소비자 안전 피해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자·IT업계 단체인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는 소비자 안전 관련 피해 증가, 제품 고장 발생, 피해 관련 책임 소재 분쟁 등을 들어 반대 입장을 보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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