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코웨이 등 '핫 딜' 제안도 못받아…'우물 안'에서도 들러리
“프레젠테이션을 받아보면 압니다. 인수 후보군 발굴이나 가격 결정 능력 등에서 수준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한 기업의 지분 매각을 추진하고 있는 사모펀드(PEF) 담당자의 지적이다. 그는 매각 자문사를 선정하기 위해 국내외 증권사로부터 프레젠테이션을 받은 뒤 주저 없이 외국계 증권사를 택했다.

자본시장법 시행 3년을 맞은 한국 투자은행(IB)의 ‘우울한’ 현주소다. 2009년 2월 ‘한국형 골드만삭스 출현’을 목표로 자본시장법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으나 국내 IB는 ‘우물 안에서도 밀리는 개구리 신세’라는 자조 섞인 평가를 듣고 있다. 웅진코웨이 매각과 LIG넥스원 지분 매각 등 올해 주요 빅딜의 주관사 선정에 국내 IB는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자본시장법 시행 당시 “1986년 영국 금융시장 빅뱅의 10배에 달하는 변화가 올 것”이라던 정부 공언(公言)은 공언(空言)이 돼가는 분위기다.

◆구색 맞추기 전락한 IB

자본시장법 시행 이후 국내에서 영업하는 증권사는 60개에서 62개로 늘었다. 정부는 증권사 간 인수·합병(M&A)을 유도한다고 했지만 신규 진입자만 더 생겼을 뿐 M&A는 없었다.

증권사들의 자본금은 2008년 말 31조8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41조원으로 10조원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말 대우증권 우리투자증권 등 상위 5개사는 프라임브로커리지 자격을 따기 위해 3조5000억원 규모의 증자를 단기간에 단행했다. 그럼에도 국내 상위 5개 증권사의 평균 자기자본(3조2000억원)은 여전히 골드만삭스의 30분의 1에 불과하다.

정부의 증권사 대형화 정책에 맞춰 자본금을 늘린 증권사들도 기대보다는 우려가 심하다. IB의 기업대출과 프라임브로커 신용공여라는 새로운 영역에 진출하기 위해 자본을 확충했지만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물 건너가버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증권사들 스스로도 몸집은 다소 커졌지만 아직 정부 정책에 의존하는 ‘피터팬 증후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사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5대 증권사의 2010사업연도 순영업수익에서 증권 인수·주선과 M&A 자문 등 IB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5.9%에 불과하다. 대부분 수익을 위탁매매와 상품판매 등 ‘저 위험-저 부가가치’ 사업에서 올리는 게 현실이다.

자본시장법 시행 이후에도 창의적인 사업영역 확대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5대 증권사의 IB 수익 비중은 2001~2005년 평균(4.9%) 대비 1.0%포인트 확대되는 데 그쳤다.

중소 증권사를 포함하는 전체 평균인 7.5%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등 글로벌 IB가 해마다 순영업수익의 15~20% 이상을 IB 부문에서 벌어들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시장 규모의 성장이나 관계가 좋은 대기업이 진행하는 일부 ‘대형 딜’에만 의존하다 보니 실적 부침도 심하다. 국내 IB 최강자로 평가되는 우리투자증권의 2010사업연도 IB 수수료 수익은 571억원으로 2008년 632억원보다 오히려 줄었다.

◆‘제살 깎아먹기식’ 출혈 경쟁

국내 IB의 더딘 성장에는 ‘헐값’ 수준의 수수료 경쟁이 한몫하고 있다. 기업공개(IPO) 주관은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들고 수수료는 박한 대표적 업무에 속한다.

작년 말 상장한 GS리테일의 경우 공모 규모가 3000억원에 이르렀으나 6개 증권사들이 챙긴 상장 수수료는 24억원에 불과했다. 수수료율은 0.8%로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 증시 상장을 앞둔 페이스북이 50억달러(5조6000억원) 규모의 공모를 진행하면서 수수료로 최대 10%를 지급할 계획인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한국항공우주(공모액의 0.9%) 현대위아(1.3%) 등 지난해 상장한 주요 기업의 수수료는 대부분 1% 안팎에 그쳤다. IB 입장에선 차별화가 힘들어 경쟁사보다 높은 수수료를 제시하기 어렵고, 주관사를 선택하는 기업 입장에선 낮은 수수료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보니 관행처럼 낮은 수수료가 적용되고 있다.

저가 수주 경쟁은 M&A 시장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의 대우조선해양 지분 매각 주관사로 선정된 신한금융투자·모건스탠리 컨소시엄은 불과 0.05%의 수수료를 제시, 사실상 실비만 받고 딜을 따냈다. 입찰에 참여한 8곳 중 2~3곳이 0.1% 미만의 수수료를 적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채 발행 시장도 마찬가지다. 기업들로선 보다 낮은 금리에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금리는 신용등급에 따라 거의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IB가 끼어들 여지가 적다. 그렇다 보니 IB들이 회사채 발행을 주관하기 위해선 자신들이 받는 수수료를 깎아줄 수밖에 없다.

장승철 하나대투증권 사장은 “우리나라의 한 해 IB 수수료 시장 규모는 6000억원 안팎”이라며 “이를 두고 국내외 수십개 증권사가 경쟁하다 보니 1위 IB도 1000억원을 가져가기 힘든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IB가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업무 영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글로벌 IB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태호/안재광 기자 thlee@hankyung.com

마켓인사이트 2월13일 오후 1시12분 보도